대마도 우리땅 운운이 욕을 먹는건...

82년 전부터 계획된 동북공정

대륙 좋아하고 고조선, 고구려의 영토를 턱없이 과장시키는 사람들이 백세 무병장수할 정도로 욕을 얻어 먹었던 이유는 그들의 주장이 근거없는 낭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사람들이 추구해온 본래의 순수한 의도를 진창에 빠뜨릴뿐 아니라 쓸데없는 빌미만 제공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대마도도 우리땅

그래도 백제가 강남을 400년간 통치하고운운은 사학계 정설이 아닌 비주류들 주장입니다. 근데 저 대마도 운운은 현재 국회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가진 여당의 주장이니 더욱 문제입니다.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가장 큰 근거가 "대한민국이 50년간 실효지배를 해온땅이다."인데 조선시대 잠깐 정벌한거빼고 몇백년간 일본의 영향아래 있었던 대마도를 우리땅이라고 우기면 그동안 실효지배 운운한게 뭐가 되겠습니까.

우리땅 독도를 지키기 위해선 좀 역사왜곡에 부정한 짓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어쩌면 정말 그렇다고 믿고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순간, 독도를 지키겠다는 순수한 의도는 흐려지고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는건 생각 안하는듯 합니다. 그래서야 그렇게 욕하는 중화주의, 일본극우들과 다를게 뭐냐구요? 그들의 주장이 우리의 영토와 역사, 주권을 침해하니 그에 맞서자는건데 인터넷 키워도 아닌 국정을 이끌어가는 분들이 그들이랑 똑같이 왕왕거리면 어쩌라구요.

정말 독도를 지키고 싶으면 독도가 왜 우리땅인지 알리고 제대로 가르치는 일부터 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길에 나가 독도가 왜 우리땅이냐고 물으면 제대로 대답할 사람은 의외로 적을겁니다.

한나라당을 지지하건 지지하지 않건 독도는 국민 모두의 문제고 잘못되면 국제망신, 자칫 후손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될순 있으니 잘해주길 빌어야 하는데... 독도에 호텔? 세계에서 제일 작은 호텔 기네스에 도전하려는 걸까요 아니면 독도 앞바다에 시멘트라도 갖다 붓겠다는 걸까요? 찌라시 표퓰리즘도 정도껏 해야지  

by rezen | 2008/07/20 22:17 | 기타 잡다한것 | 트랙백 | 덧글(13)

여수입니다.

어제 아침 일찍 출발해 진주성을 둘러본 다음 부리나케 통영으로 향했습니다.

날이 좀 덥긴 했지만 돈을 들인만큼 본전을 찾자는 생각에 열심히 돌아다녔습니다. 마침 통영은 향토역사관, 세병관, 충렬사, 문하마당, 남망산등 주요 관광지가 대부분 인접해 있어서 도보로도 충분히 하루만에 관람이 가능하더군요. 다만, 남망산 조각공원에 갈때 카메라를 빼먹어서 충무공 동상(1953년) 못찍은게 아쉽습니다.   

오늘은 아침에 한산도로 가서 제승당을 둘러본 다음(한산도는 제대로 관광하려면 반드시 자가용을 가져가는게 좋습니다.) 진주-순천을 거쳐서 여수에 도착했습니다. 

다 그런건 아니겠지만 순천도 여수도 명색 시인데 참 한산하고 뭔가 좀 투박해 보이고 시골느낌이 납니다. 내일 아침에 진남관과 타루비, 좌수영대첩비를 둘러본 다음 경주로 갈 생각입니다. 충주는 버스요금 비싸기만 비싸고 숙박, 교통이 불편하고 배차 시간이 어정쩡해서 일정 다 말아먹겠다 싶어서 다음 기회로 미뤘습니다. 기왕에 혼자 여행하는데 좀 여유를 가지고 하고 싶습니다. 

통영에서 묵었던 여관은 숙박비가 저렴한 대신 '여기 3층인데 불나면 어디로 도망가지? 저 아래로 뛰어내릴까? 창문은 열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곳이었는데 지금 머무르고 있는 모텔방은 넓은 크기, 에어컨, 인터넷까지 TV화질 안좋은거 빼고는 흠잡을게  없네요. 어제 점심, 오늘 아침 굶고 이틀간 김밥순례를 한 보람이 있어요. 내일은 어느 김밥집을 갈까...근데 아침은 먹을수 있을까?

by rezen | 2008/07/17 23:56 | 기타 잡다한것 | 트랙백 | 덧글(5)

여행계획을 세웠습니다.

여름 방학을 맞아 유적답사 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자금 사정으로 멀리는 못가고 대중교통으로 김해(출발) -> 진주-> 통영->여수-> 충주-> 부산을 거쳐 김해에 도착하는 일정입니다. 주로 임진왜란 관련 유적들을 살펴보고 충주에선 중원고구려비와 충주박물관등 여기저기 돌아다녀볼 계획입니다.   


입장료는 대개 국립, 도립, 시립 관광지라 그다지 큰 타격을 입힐 것 같진 않은데 문제는 교통비와 식비, 숙박비입니다. 교통비는 계산이 끝났는데 식비는...계산이 잘 안나오네요. 마침 날도 더워서 시원한 군것질거리에 손이 가기도 쉽고 말입니다. 매끼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건 사치고 그렇다고 면식수행은 싫고해서 여행지 근처 김밥천국 위치를 체크해놓았습니다. 숙박비는 다리 밑에서 잘순 없고 하루에 2~3만원 하는 여관에서 계속 잘려니 돈이 아까워서(-_-;) 찜질방이나 값이 싼 유스호텔을 이용할 생각입니다.

진주-진주성, 진주박물관
통영-향토역사관, 세병관, 충렬사, 착량묘, 한산도
여수-충렬사, 진남관, 타루비&좌수영대첩비
충주-탄금대, 중원고구려비, 충주박물관, 기타 불교유적

내일 출발할 예정입니다. 바람이 좀 불고 날씨가 덜 더우면 좋을텐데 말이죠.

by rezen | 2008/07/15 21:59 | 트랙백 | 덧글(6)

적벽대전 봤습니다.

조조활인으로 싸게 보고왔습니다. 초반에 너무 질질끈다 싶더니 시리즈물이더군요. 후속작은 연말에 개봉한답니다. 이번 편은 딱 적벽대전 시작하는 부분까지 다룹니다. 스토리는 연의 바탕으로한 오리지널이구요. 상당히 심플한 내용인데 해외시장을 노리는 모양입니다.(돈을 800억이나 때려부었으니...)

등장인물들을 살펴보면


주유: 주유인지 여포인지 아주 날라다닙니다.

감녕: 같이 날라다닙니다.


유비: 서민...좀 찌질해요.

관우: 무적 승마보병, 장판파전투에서 조조군에 포위당했다 조조의 배려로 살아남습니다. 화용도 일화가 나올게 분명한데 그냥 나오면 삼국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해를 못할테니 일부러 장판파에서 오리지널 스토리를 집어넣은 모양입니다. 용의 부활에서 관우역을 맡은 적룡이나 84부작 삼국지 드라마 관우보단 중후한 맛이 떨어져 보였습니다.   

장비: 전신이 무기, 서예에 익혔다는 점은 정사를 참고한듯 합니다.

조운: 초반부터 대부분의 액션을 맡고있습니다. 배우가 떡대가 좋아 힘쓰는 역에 잘 맞아 떨어진것 같습니다. 


조조: 거만+색마+색골+색귀+포악+양민학살+악질 스토커

위나라 장수들: 존재감 없음, 판소리 적벽가 만큼이나 안습입니다. 그나마 개념있게 나오는게 채모더군요.

그외

-그놈의 비둘기...후반부부터 아주 본격적으로 날라다닙니다. 대체 전생에 비둘기랑 무슨 인연이길래?

-비둘기 말고도 새, 말, 호랑이, 거북이까지 동물 종합선물세트.

-당연한 말이지만 중궈는 No CG, 스케일입니다.

-장면전환이 좀 매끄럽지 못합니다.

by rezen | 2008/07/11 13:11 | 기타 잡다한것 | 트랙백 | 덧글(8)

송유진의 난

1594년 갑오년, 전란을 소용돌이속에 과도한 부역과 과세로 피폐해진 남부지방에선 유민들이 속출하고 싸울 의지를 잃고 도망친 군사들이 도적떼가 되어 험조한 곳에 매복하거나 의병을 사칭하며 백성들을 약탈하는 사례가 늘어났습니다. 특히 한강 이남의 경기지역과 호서 지역에서 이런 도적떼가 성행했는데 수령들이 군사를 풀어 토벌해도 일시적인 대책일뿐 곧 다시 모이곤 해서 소탕에 몹시 애를 먹었습니다.

선조 47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월 8일(정해) 2번째기사
충청도에 도적이 치성하니 감사에게 잘 조치하라고 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근일 충청도 내에 도적이 점차 성하여 부자로서 조금이나마 재곡(財穀)을 저축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 창고를 봉해 놓고 쓰지 못하도록 으름장을 놓는다고 하는데, 그 조짐이 우려됩니다. 내부의 급박함이 외적에 못지 않으니 은밀히 감사에게 유시하여 그로 하여금 그때그때 기미를 살펴 특별히 조처하여 후환을 근절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송유진은 30세의 서울 서족 출신 무뢰배로 전쟁을 틈타 역을 피해 도망친 백성들과 사족, 무인일부를 끌어 모은 무리를 이끌고 천안과 직산 사이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다가 주변의 다른 도적떼들을 규합하고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오직 군량과 기계를 모을 뿐이다.”며 의병대장이라 자칭했습니다. 

어느정도 세를 불리는데 성공한 그는 지리산, 속리산, 광덕산, 청계산등에 그들을 배치했습니다. 그러다 동료 오원종에게 도성의 수비가 허술하단 말을 듣고 일당들과 모의해 1월 10일에 군사를 동원하여 아산, 평택 지방의 병기를 빼앗아 가지고 경성에 쳐들어가기로 약속한 다음, 광해군이 이끌던 전주의 분조(分朝)에 다음과 같은 밀서를 보냈습니다.

“임금의 죄악은 고쳐지지 않고 조정의 당쟁은 풀리지 않았다. 부역이 번거롭고 중하여 민생이 불안하다. 목야(牧野)에서 매처럼 드날리니 비록 백이숙제(伯夷叔齊)에게 부끄럼은 있으나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죄인에 벌주니 실로 탕무(하의 걸왕을 몰아낸 탕왕과 은의 주왕을 몰아낸 무왕)에 빛이 되리로다.

송유진 일당의 모의는 충청도 어사 강첨에 의해 조정에 보고됩니다. 

선조 47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월 11일(경인) 4번째기사
충청도 조도 어사 강첨이 송유진 역모의 상황에 대해 보고하다

충청도 조도 어사 강첨이 치계하였다. 
“전 교관(敎官) 유징이 와서 말하기를 ‘목천에 사는 석경천이 「천안의 군기 감관(軍器監官) 송망기·준기와 그의 아비 송흥수가 도적에게 사로잡혀 갔고, 동군의 유춘복·송연복·박순개도 도적에게로 들어갔는데, 어느날 이들이 나와서 동군 사람들에게, 적장의 성(姓)은 이씨인데 그 이름은 말할 수가 없고 현재 청계산에 머물고 있으며 춘천, 해주에 각각 1진씩 주둔하고 있는데 그 여당이 충청도에 산재하여 있고 또 1진은 전라도에 있는데 이달 1월 20일에 거사하려 하며 전라도에 있는 1진은 동궁의 행차를 살피기 위한 것이라는 말로 유인하였다. 」고 했다.’ 하였습니다.

조정에선 병기를 관리하는 관리인 송망기가 잡혀갔다는 소식에 민감히 반응해 즉시 선전관에게 금군을 딸려 파견해 송망기를 추적하게 했습니다.

병사 변양준과 순변사 이일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도적이 있는 지역을 순찰하면서 기회를 보아 체포하라는 명을 내리는 한편 한양에서 가까운 청계산에 주둔하고 있다는 적을 수색하기 위해 방어사 변응성에게 순찰을 핑계로 은밀하게 청계산 일대를 정찰할 것을 지시합니다. 해서민을 보살피기 위해 당시 황해도 해주에 머물고 있던 우의정 유홍에게도 이 사실을 즉각 전달해 도내 군사 훈련 상황과 병기 제작 현황을 상세히 기록해 보고하게 하고, 황해병사 조인득을 시켜 황해도 평산 등지에서 날뛰던 도적떼를 긴급히 체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조정의 발빠른 대응이 무색하게 다음날 송유진과 그 일당의 체포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선조 47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월 12일(신묘) 4번째기사
송유진 등을 체포한 임달신·홍응개 등을 시상하다

적정(賊情)을 진고(進告)한 사람인 직산 좌수 임달신과 적장 송유진(그외 심희수, 오원종, 유춘복, 김천수등)외 10명을 체포한 사람인 홍응개·홍난생·홍우·신계축·홍찬·김응추·홍각등에게 차등 있게 상직(賞職)하였다.
송유진과 그 일당이 모두 체포되었음에도 선조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송유진이 난을 일으키며 판서를 사칭했는데 선조는 이것이 그의 위에 다른 수괴가 있다는 증거로 보았습니다. 이에 성문과 한강의 경비태세를 더욱 철저히 할것을 명하는 한편 남산위에 군사를 보내 사방을 감시하게 했습니다. 또한 병부는 장사들을 뽑아 대오를 나누어 대기하게 했으며 각종 병기를 숫자로 헤아려 궐내로 반입하게 하고 병기의 제조를 담당한 군기시와 왜군이 군량을 쌓아놓던 용산창에도 군사를 배정해 지키게 했습니다. 

어느정도 조치가 치해지자 다시  구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사헌부에선 죄인들을 즉시 서울로 압송할것을 주장했으나 유성룡은 송유진 일당을 서울로 압송하는 과정에서 변고가 생길 수 있고 (선조 생각처럼) 그 곳에 적의 괴수가 있다면 압송을 미루고 군사를 풀어 일망타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선조는 사헌부의 손을들어 선전관, 금군, 금부도사를 파견해 수로를 통해 죄인들을 서울로 압송해오게 합니다.


죄인들이 압송되어 오기 며칠전인 1월 17일, 비변사에서 의병장 이산겸을 반군의 수괴로 지목했습니다.

선조 47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월 17일(병신) 2번째기사
비변사에서 송유진 역모의 괴수로 이산겸을 지목하고 체포할 것을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충청 병사 변양준의 서장을 보건대, 역적 송유진의 초사에 드러난 사람에 대해 그 허실은 알기 어려우나 십분 계책을 강구하여 제때에 체포하여 빠져나가는 적이 없게 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중략)
보령에 사는 이(李)씨 성을 가진 사람은 이산겸인 것 같습니다. 산겸은 일찍이 의병에 투탁하여 거느린 군사가 자못 많았으나 한 사람의 왜적도 체포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난해 중국 사신을 만나기 위해 개성에 와 있었는데 그의 사람됨을 본 이들의 말에 의하면 말솜씨가 상당히 능란했다고 합니다. 그 뒤 호서에서 온 사람들이 하는 말에 따르면 산겸이 모집한 군대가 아직도 그대로 있는데 산속에 쌓아 놓은 군량과 무기 또한 많다고 하였습니다. 
 
이산겸은 충청도 보령출신으로 토정 이지함의 서자로, 임진년에 조헌의 의병군에 참여했으나 2차 금산전투에는 참가하지 않고 살아남아 조헌군의 잔존병력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해온 인물이었습니다. 왜군과의 싸움에선 그리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고 몇번이나 의병을 해산시키고 본가로 돌아갔던 적이 있었으나 강개하고 의기가 있어 사람들의 신임을 얻고 있었습니다. 송유진이 한창 난리 피울때는 전라도에 가있었지요. 보령출신 이씨가 자기 혼자만 있는것도 아닌데 의병일으켜 군사를 이끌고 있어 역적수괴로 지목받았으니 참...

이산겸의 체포명령이 떨어지고 1주일뒤 대궐뜰에서 송유진 일당의 국문이 시작됩니다. 송유진은 반란수괴는 이산겸이고 자신은 아이들 모아놓고 훈장 노릇하다 어쩌다보니 말려들었다고 발뺌했으나 그러나 다른 주모자 격인 김천수, 오원종, 유춘복 등을 국문한 결과, 괴수는 송유진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날 선조는 “적이 이른바 청계산이다, 가야산이다 한 것은 허장 성세로 사람들을 공동시키기 위한 말인 것 같다. 이산겸이 괴수라고 하지만 송유진이 진짜 괴수이다.”라고 결론을 내렸고 홍우, 홍근(송유진의 일당이었으나 마음 바꿔 송유진을 체포한 사람)도 이산겸에 대해선 아는바가 없다고 진술했습니다.

다음날(1월 25일) 다시 열린 국문에서 '도성의 방비가 허술하니 군사 1천 명으로 포위하고 서서 3일간 통곡하면 임금이 반드시 허물을 고칠 것이다.'라고 바람넣은 사람은 오원종이며 침술이 뛰어나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던 그가 사람들 끌어들이는데(혹은 낚는데) 활약했음이 드러났습니다. 2차례에 걸친 국문끝에 송유진 일당이 말만 번지르르 할뿐 그저 규모가 좀 큰 도적떼에 불가하며 그나마도 과장되어 있다는것을 그 좋은 머리로 파악한 선조는 그들을 모두 능치처참에 처하고 가재, 전답, 잡물 등은 그를 체포하는 데 공을 세운 이들에게 분배했습니다.

남은건 송유진 일당에게 속았거나 허위진술로 억울하게 연류된 의병장, 현직 관원, 양반등의 처리문제였습니다. 이산겸, 여대로, 노일개, 조원, 신응희, 김달효, 조희진 등이 있었는데 대부분 석방되었습니다. 한명 빼고...

선조 48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2월 6일(을묘) 2번째기사
송유진 역모와 관련된 죄인 이산겸 등을 친국하다


(중략)
(의병이 좀처럼 모이지 않아)동궁을 호위하려 하다가 전라도의 병사를 모집하는 곳에 자원해볼까 하여 전주·담양을 거쳐 김덕령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정월 15일에 중로에서 충청도에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으나 어떤 도적인지를 몰랐는데 저물녘에 적계(嫡系)로 4촌인 도검찰사(都檢察使) 이산보를 찾아가 만나보니, 산보가 ‘충청의 적을 사람들이 모두 너라고 생각하는데 네가 지금 왔으니 너는 살 길이 있겠다.’ 하였습니다. 나는 무군사(撫軍司)에 직접 나타나고자 하여 드디어 좌의정을 가서 보았고, 또 병조 판서를 보고서 말하기를 ‘상소로 직접 아뢰고자 하나 그 도적의 일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다른 사람의 일이라 지휘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충청 감사가 나를 수금(囚禁)할 때에도 또한 분명히 말하지 않고서 군기를 바치지 않았다는 혐의로 가두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도적의 초사에서 나왔으니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송유진의 얼굴은 전혀 알지도 못하고 그 성명 또한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내가 연소한 서얼로 의병을 거느렸으므로 필시 이 때문에 내 이름을 듣고 끌어댔을 것입니다. 우리 집 문서를 수색해 보아도 전혀 의심스러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상소를 지어 옷 안에 품고 무군사 앞에서 목을 매려 하였으나 이미 도적의 초사에 나왔는데 도피하면 임금을 배반하는 사람이 되겠고 늙은 어미를 버리고 죽으면 어버이를 저버리는 사람이 되겠기에 궐하에 나아가 조용히 죽음의 길로 나아가려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산겸은 처음부터 끝까지 송유진을 모른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란에 동조한 인물들을 제대로 가려내기 위해 불러올린 홍근등도 이산겸에 대해선 아는바가 없다고 진술했으며 선조 본인 입으로도 괴수는 송유진이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근데 왜?

선조 48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2월 14일(계해) 4번째기사
충청도 도적(송유진 역옥)과 관련된 죄인을 친국하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금부도사가 산겸의 주머지에서 편지를 얻었는데 하나는 김덕령이 산겸으로 하여금 모군토록 한 것이며 하나는 산겸이 처자와 영결(永訣)한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일이 옥사에 관계가 있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옥사와는 관계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처음부터 의심하였다. 산겸이 만약 진짜 도적의 괴수였다면 정월 15일의 거사에 어떻게 네 마리 말을 얻어서 전주로 돌아가겠는가. 송적(송유진) 이미 적장인데 그 위에 어찌 다른 사람이 있겠는가. 이것은 송적이 성세(聲勢)를 과장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현혹시킨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산겸은 이미 적의 초사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죽어야 할 따름이다. 나의 이 말은 산겸을 용서해 주려는 것이 아니다.”

 
역적입에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한거 뻔히 알면서 의병장을 두들겨 패죽였습니다. 일본 장수들이 해야 할일을 조선왕이 대신 팔 걷어 붙이고 해주니...권력자들 머리속은 범인과는 달라도 많이 다른 모양입니다.

by rezen | 2008/07/08 22:25 | 잡설 | 트랙백 | 덧글(10)

핸콕(네타있음)

본래 강철중을 보려고 했으나 함께간 친구둘이 바득바득 우기는 바람에 핸콕을 보게되었습니다. 예고편만 봤을때는 엄청 강력하지만 성격 까칠한 슈퍼히어로가 개과천선하는 액션 히어로물로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중간까진 그렇게 되었구요.

전반부 스토리를 요약하면 슈퍼히어로지만 알콜중독에 성격파탄인 핸콕은 항상 선행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범죄자가 입히는 것보다 더 심각한 피해로 LA를 뒤집어 놓아 끊임없이 욕을 얻어먹고, 미움받고, 고소를 당합니다. 그러다 자기가 한 번 구해주었던 한 PR 전문가의 설득으로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 이미지 변신을 꾀하게되죠...여기까진 그런데로 괜찮았습니다. 그렇게 개과천선해서 은행강도 때려잡을때만 해도 이제 도시를 위협하는 대악당이 나타나고 핸콕이 때려 잡을줄 알았죠.

그런데 왠걸 알고보니 친구인 PR전문가 아내가 자기랑 한쌍으로 태어난 슈퍼 히어로라는 뜬금없는 전개가 벌어지더니 이후 히어로도 스토리도 같이 힘을 잃고 비실비실 거리며 엉뚱한곳으로 흘러가버립니다.

히어물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인 악역 캐릭터들은 '왜 태어났니~' 수준의 칼없스마를 자랑하는데 악당 두목인 스탠버드 교수출신 은행털이범은 PR전문가가 휘두른 도끼로 이마 까이기 전까지 얼굴보여준게 한 10분이나 되려나 모르겠고 그밑에 똘마니둘은 마지막 1초까지 재면 5분 정도 나왔을겁니다. 그 두목이 어째서 핸콕이 수천년 전부터 오래오래 살아온걸 알고있는지, 핸콕과 옛 연인(PR전문가 아내)을 몇번이나 습격했던 '그들' 이 누군지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히어로물 주제에 시작부분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액션도 없고 그 액션도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헐크같은 요 몇년사이 개봉한 다른 히어로 영화들과 비교하면 귀여운 수준입니다.

결론

누구보다도 사랑받고 싶어하지만 다가서는 방법을 모르는 고독한 슈퍼히어로의 짠하고 유머러스한 이야기가 좋으신 분. 윌 스미스의 뛰어난 연기를 감상하고 싶으신 분께 추천합니다.

혜성같이 나타나 강력한 힘을가진 악당들을 처단하는 일반적인 히어로 영화를 원하시는 분들께는 비추천입니다.

by rezen | 2008/07/03 16:55 | 기타 잡다한것 | 트랙백 | 덧글(2)

나의 전생테스트

을파소의 전생

을파소님 이글루서 트랙백합니다. 닉네임이랑 이것저것 넣어보는 분들도 계시던데 전 그냥 생년원일에 본명 하나만 가지고 해봤습니다. 하시는곳은 여기입니다. 결과는...

꽤 리얼계군요. 확실히 아기는 엄마젖 먹을때가 제일 행복하고 못먹을때가 제일 불행하겠죠.

근데 같은 세상에 영혼이 2개면 이놈같이?

푸하하

by rezen | 2008/06/30 11:43 | 트랙백(1) | 덧글(10)

야후 블로그 랭킹

요샌 이런식으로 랭킹따지는게 참 많네요. 저도 한번 해봤습니다. 하는 방법을 몰라 좀 해맸는데 야후검색에서 아무거나 검색한다음 통합검색말고 블로그탭에 들어가 오른쪽 아래의 블로그 랭킹 검색에 http://~부터 입력하면 됩니다.

451위군요. 만단위 밖으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높네요. 표본도 상당히 많구요. 좋긴한데 대체 기준이 뭘까요?

by rezen | 2008/06/28 00:04 | 트랙백 | 덧글(5)

수령이 암행어사에 맞서는 법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는 감찰 제도는 조금씩 차이는 있을지언정 먼 옛날부터 있어왔던 제도로서 조선 초기에는 사헌부에서 행대감찰(行臺監察), 분대감찰(分臺監察)을 파견해 지방을 살폈습니다. 이들외에도 암행 경차관, 찰방등이 왕명을 받고 지방에 파견해 수령들의 폐해를 조사하고 민정을 살폈으며 세조때는 선차사, 문폐사등을 관리를 파견해 암행감찰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성종 10년(1479년) 11월 대사헌 김양경이 암행어사 파견을 건의하면서 실록에 처음으로 암행어사라는 용어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성종16년

성종 181권, 16년(1485 을사 / 명 성화(成化) 21년) 7월 6일(갑인) 3번째기사
의정부· 영돈녕 이상을 불러 홍문관의 상소에 대해 다시 의논케 하다

(중략)

“윤해가 전에 청송부사가 되었을 때에 암행어사(暗行御史)를 보내어 조사하였으나, 한 가지라도 차착(差錯)이나 과실이 없었다. 감사와 수령은 그 소임이 서로 비슷한 것이다.(하략)

성종의 이 언급을 통해 성종때 암행어사가 처음 파견되었음을 확인할수 있습니다. 암행어사는 이후 고종때까지 약 400여년간 실록에만 천건이 넘게 등장합니다. 언제 어디에나 있는 부패관리들에겐 기나긴 투쟁(?)의 시작이었습니다.

1. 문닫아 걸고 버티기

중종 52권, 20년(1525 을유 / 명 가정(嘉靖) 4년) 1월 23일(임오) 4번째기사
황해도 어사 조종경이 강령현 수령의 불법한 일을 치계하다


황해도 어사 조종경이 치계하기를, “신이 강령현(康翎縣)에 갔더니 수령이 성문을 닫고 들이지 않으므로, 신이 성문을 차서 부수게 하여 들어가서 불법한 문서를 찾아내어 함봉(緘封)하여 올려보냅니다. (중략)
  
성문을 부수고 현을 접수한 조종경은 관사를 샅샅이 뒤져 불법을 저지른 문서를 발견했고 여죄수 2명이 남자 감옥에 갇혀있는 사실을 발견했고 진군(지방의 병영과 수영에 속한 각 진에 둔 지방 군대)의 숫자가 크게 모자란것과 절반이 묵은 논밭, 유생4명만 있는 향교등 현령의 비리를 낱낱히 조사해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승정원에선 오히려 강령현감을 두둔하며 잘못이 크면 보고하고 작으면 올라온 뒤에 아뢰라 했는데, 작은 잘못까지 보고했으니 다시는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할것을 주장합니다. 중종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어사가 갔는데 수령이 문닫고 들이지 않았는데 뭔 소리냐며 조종경은 큰일을 했고 현령은 즉시 의금부로 압송할것을 지시했으나 강령현감 신붕년은 이튿날 이방과 함께 달아나 5년후에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후 성문 닫고 버티기는 유행처럼 번져

중종 66권, 24년(1529 기축 / 명 가정(嘉靖) 8년) 11월 8일(경자) 3번째기사
강원도 어사로 나간 직제학 권예가 복명하다


강원도 어사인 직제학 권예가 복명(復命)하고 아뢰었다.
 
“신이 평해(平海)에 도착하였을 때 성문을 굳게 잠그고 들여보내지 않아 오래도록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평소엔 밤에는 성문을 닫고 낮에는 여는 것이고, 어사는 곧바로 들어가서 수색, 체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문을 닫고 들여보내지 않았습니다. 이는 매우 부당한 것이므로 아룁니다.”

중종 77권, 29년(1534 갑오 / 명 가정(嘉靖) 13년) 5월 14일(경진) 1번째기사
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았음을 오세우가 아뢰니 만호를 파직·추국하도록 전교하다

경상도 어사 오세우가 (중략) 또 아뢰기를, “신이 옥포에 이르자, 신이 오는 것을 바라보고서 성문을 닫아버렸고, 각가지로 타일러도 지체하고 즉각 문을 열지 않다가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열어주었습니다. 그제야 들어가 조사하였기에 감히 아룁니다.”
 
이런식으로 파면당할걸 알면서도 일단 문닫고 버티고보는 수령들이 속출했습니다.

중종 81권, 31년(1536 병신 / 명 가정(嘉靖) 15년) 5월 10일(갑자) 4번째기사
어사 김익수가 지방 감찰 내용을 보고하다

충청도 어사 김익수가 복명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신이 1일에 전교를 받고 비인현(庇仁縣)에 도착하였는데 현의 성문을 닫고 들여보내지 않았으니, 이는 현감이 시킨 것인지 아전들이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임금의 명을 받들고 간 사신을 대우하는 사체가 지극히 매몰스러웠습니다.(중략)

성에 들어가지 못한 김익수는 하는수 없이 가까운 공주로 향해 2경 무렵에야 도착할수 있었습니다. 햇불도 없어 밤길을 걸어 감영에 도착했으나 목사도 판관도 아무도 맞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루종일 말을 달린탓에 공복이 심했으나 아무도 맞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밥얻어 먹을 길이 없어 그대로 걸인마냥 밤을 새우고 아침에도 밥주는 사람이 없어 쫄쫄 굶은 배를 움켜지고 나와야 했습니다. 중종은 비인현감과 공주목사가 파면시키고 조정의 위신을 떨어뜨린 자신을 처벌해 달라는 김익수의 청을 거절하는 것으로 사건을 매듭지었습니다.

2. 절도, 강도

중종 92권, 34년(1539 기해 / 명 가정(嘉靖) 18년) 10월 15일(기묘) 1번째기사
강원도 어사 송기수가 불법 행위의 증거인 문서를 도둑맞아 추고하다


강원도 어사 송기수가 아뢰기를,
 
“신이 이달 초열흘날 어둘녘에 강릉에 도착하여 압수한 문서 세 건을 책상위에 봉한 채 두고 바빠서 미처 열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서 환곡을 조사하고 있었는데, 어떤 아이가 다른 봉서(封書)로 바꿔치기해 놓고 그것을 가져 갔습니다. 그리고 향교를 조사할 때 다른 봉서마저 또 도둑맞았습니다.”

사헌부의 조사 결과 강릉부사 장계문과 판관 이찬조가 불법문서를 어사에게 압수당하자 하인을 시켜 훔치고 다른 문서로 바꿔치기 한 진상이 드러났습니다. 문서 관리를 제대로 못한 송기수가 문책을 받고 장계문, 이찬조가 파직당하는것으로 사건은 종결되었습니다. 

명종 9권, 4년(1549 기유 / 명 가정(嘉靖) 28년) 10월 23일(기미) 2번째기사
어사의 일을 방해한 황해도 우봉현 현령 김대의 추고를 명하다


황해도어사 정희홍이 아뢰기를,
 
“신이 우봉현에 도착하여 문서가 들어 있는 작은 상자 하나를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일용 미곡의 수량과 남에게 준 물건에 대해 기록되어 있기에 봉하여 신의 종인(從人:수행원)에게 주었습니다. (중략)
 
정희홍은 수행원을 남겨두고 잠시 다른곳을 살펴보러 갔는데 우봉현령 김대가 그틈을타 수행원을 습격해 머리채를 쥐어뜯고 옷소매로 입을 틀어막아 쓰러뜨린 다음 문서를 빼았아 달아났습니다. 명백한 현령의 잘못이었으나 중간에 흐지부지 종결되어 버렸습니다.

3. 선수필승?

명종 10권, 5년(1550 경술 / 명 가정(嘉靖) 29년) 4월 10일(갑진) 2번째기사
사헌부가 어사의 일을 방해한 양덕 현감 이명귀를 추문할 것을 아뢰다


헌부가 아뢰기를,
 
“양덕현감(陽德縣監) 이명귀는 본래 용렬한 사람으로 어사가 양덕현을 지날 때 나졸을 풀어 어사가 거느리고 간 종을 뒤쫓아 붙잡고, 또 군사를 풀어 활과 화살 및 큰 몽둥이를 가지고 가서 좌우를 둘러쌌습니다. 또 군사를 더 풀어 1식(30리) 거리의 길을 뒤쫓아 보내어 어사를 억류하여 가지 못하게 하고서, 몰래 이웃 고을에 통보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해괴한 일은 근래에 듣지 못한 바입니다. 속히 잡아다가 추문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암행어사는 비밀엄수가 생명인데 어사가 띨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정보통이 있었는지 정체가 들통나 어사출두도 하기전에 지방수령이 먼저 군사를 풀어 어사를 억류하고 주변 고을에 그 소식을 알려버린 어처구니 없는 사건입니다. 

이명귀는 의금부에 끌려가는걸로 끝났지만 조정에선 한동안 시끌시끌 했습니다. 사관이 기유년 겨울(1549년 10월)에 수령이 어사가 적발한 문서를 빼앗았고(우봉현령의 문서절도) 경술년 봄(1550년 4월)에 수령이 어사를 포박하였다. 고 적으면 후세들이 오늘날 조정을 뭐라 생각하겠냐는게 신하들의 말이 었습니다.

뭐, 그래도 적을건 다 적었네요.

by rezen | 2008/06/26 23:10 | 잡설 | 트랙백 | 덧글(12)

내 블로그를 꽃으로 표현해보자

이웃분들은 다들 예쁘게 잘나왔던데 전 무슨 에러가 나서 꽃이 안나와서 한참 있다 다시 실행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제 마음처럼 시커멓네요. 아마 다 하셨을거라 생각되는데...하는곳은 여기입니다.

by rezen | 2008/06/25 15:17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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