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5월 17일
세종과 최만리의 일화를 살펴보면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가장 크게 대놓고 반발했던 신하로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최만리 입니다. 일각에서는 한자 발음까지 중국식으로 바꾸려고 했던 세종의 과격한 계획을 음운상의 대혼란을 이유로 끝까지 뜯어 말린 기개있는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잘못된 낭설이며(해주 최씨 문중에서 많이 퍼나른다던데 그래서야 <원균행장록> 지은 원주 원씨랑 다를게 뭔지...)
그는 음운학에 대해선 전혀 몰랐고 반대 이유는 더 단순한 것이 었습니다.
세종 26년 2월 20일자에 실린 그의 유명한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에서 가장 잘알려진 구절은 오랑캐 운운하는 부분입니다만 이것은 그냥 미사여구 정도로 치부할수 있는 내용이고 요점은
세종 103권, 26년(1444 갑자 / 명 정통(正統) 9년) 2월 20일(경자) 1번째기사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뢰다
(중략)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 만약에 언문을 시행하오면 관리된 자가 오로지 언문만을 습득하고 학문하는 문자를 돌보지 않아서 관아의 구실아치들이 둘로 나뉘어질 것이옵니다. 진실로 관리 된 자가 언문을 배워 통달한다면, 후진(後進)이 모두 이러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27자의 언문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立身)할 수 있다고 할 것이오니, 무엇 때문에 고심 노사(苦心勞思)하여 성리(性理)의 학문을 궁리하려 하겠습니까.
이렇게 되오면 수십 년후에는 문자를 아는 자가 반드시 적어져서, 비록 언문으로써 능히 이사(吏事)를 집행한다 할지라도, 성현의 문자를 알지 못하고 배우지 않아서 담을 대하는 것처럼 사리의 옳고 그름에 어두울 것이오니, 언문에만 능숙한들 장차 무엇에 쓸 것이옵니까. 우리 나라에서 오래 쌓아 내려온 우문(학문을 숭상함)의 교화가 점차로 땅을 쓸어버린 듯이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전에는 이두가 비록 문자 밖의 것이 아닐지라도 유식한 사람은 오히려 야비하게 여겨 이문(吏文)으로써 바꾸려고 생각하였는데, 하물며 언문은 문자와 조금도 관련됨이 없고 오로지 시골의 상말을 쓴 것이겠습니까.
앞뒤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볼때 언문을 만들면 27자만 가지고도 입신할수 있는 쉬운 세상이 되고 그럼 성리학 숭상하는 사람이 없어지고 자칫 내 밥그릇(기득권) 날아갈수 있으니 절대 안돼라고 해석할수 있습니다.
정창손은 이보다 더 나아가
‘삼강행실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무지몽매한 아랫것들은 설명해줘봐야 모른다고 했다가 세종의 진노를 사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용속한 선비라고 욕 먹은 다음 훈민정음 반대한 신하중에서 유일하게 파직당합니다.
그리고 이보다 앞서
조선은 형법으로 명나라의 대명률을 가져왔고 여기에 역대 중국의 율문을 참조했는데 어려운 한자로 되어있는 베겨오다 보니 전문적으로 법을 다루는 관리들조차 이해하기 힘들어서 애를 먹었습니다.
현대 대한민국 법학도 처음에는 일본, 다음에는 독일법 베겨와 짜집기하다 국적 불명 용어가 판치고 후학들 돌아버리게 만들었는데 이때도 크게 다르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세종 58권, 14년(1432 임자 / 명 선덕(宣德) 7년) 11월 13일(무진) 2번째기사
안숭선이 《대명률》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중외에 반포할 것을 아뢰다
(중략)
대명률은 시왕의 제도인지라 의당 봉행하여야 하겠지만, 우리 나라 사람이 쉽사리 깨닫지 못하오니 마땅히 우리 말로 번역하여, 이를 중외(中外)에 반포하시와 국민들로 하여금 강습하게 하시어, 한 차례의 태(笞)나 한 차례의 장(杖)이라도 반드시 율에 따라 시행하여 인후하신 덕을 보여 주옵소서.” 하였다.
그래서 진작부터 이런 의견이 나왔고 훈민정음 창제 훨씬 전부터 백성의 교화를 위해 고민하고 백성들이 법을 몰라 죄를 범하는것을 늘 안타깝게 여겼던 세종은 1432년(세종 14)법전을 이를 방지하기 위해 법전을 알기 쉽게 번역해 백성들에게 반포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세종 58권, 14년(1432 임자 / 명 선덕(宣德) 7년) 11월 7일(임술) 1번째기사
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다. 임금이 율문을 이두문으로 번역하여 반포할 것을 이르다
“비록 사리를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율문에 의거하여 판단이 내린 뒤에야 죄의 경중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범죄한 바가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다 율문을 알게 할 수는 없을지나, 따로이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를 이두문으로 번역하여서 민간에게 반포하여 보여, 우부우부(愚夫愚婦)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함이 어떻겠는가.”
당시 이조판서 였던 허조는
“신은 폐단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간악한 백성이 진실로 율문을 알게 되오면, 죄의 크고 작은 것을 헤아려서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없이 법을 제 마음대로 농간하는 무리가 이로부터 일어날 것입니다.”
라며 반대했습니다. 당시 보수적인 신료의 인식은 대충 비슷했던것으로 짐작됩니다.
물론 세종은
“그렇다면, 백성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고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옳겠느냐. 백성에게 법을 알지 못하게 하고, 그 범법한 자를 벌주게 되면,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술책에 가깝지 않겠는가. 더욱이 조종께서 율문을 읽게 하는 법을 세우신 것은 사람마다 모두 알게 하고자 함이니, 경 등은 고전을 상고하고 의논하여 아뢰라.”
가볍게 논파해 버리고는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만 살펴봐도 세종이 사대부만의 성군이니 하는 그런 말은 못하죠. 원균옹호론처럼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나온것도 아니고 수령고소금지법(수탈은 죄고 무고랑 공무집행방해는 죄가 아닌 모양이지)과 저화, 도둑떼에서 몇년째 전혀 벗어나지 못한채 뱅뱅도는 세종폄하론에 낚이는 사람들도 참...
# by | 2009/05/17 03:18 | 잡설 | 트랙백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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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서도 저런식으로 (밥그릇 걱정해서) 반대하던 변호사들이 꽤 있다고 하더군요.
역사라는 훌륭한 기록의 수단이 있는데도 인간은 도통 발전을 모르는 동물인 듯 합니다.
뭐 극단적으로 '국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법전 같은게 가능할리는 없지만, 일본어 단어를 그대로 가져다 뻔뻔스럽게 '교과서'에서 마구 쓰는 교수라는 양반들의 양식이 의심스러워요.
한자 발음을 중국식으로 바꾸려고 한 게 아니라 기존의 한자음을 중국식 한자음에 가깝게 바꿔서 한글 체계안에 어떻게든 끼워맞추려 한 거였죠. 착각했습니다.
다만 '훈민정음 창제 목적에 관해서는 아직 자잘한 논쟁이 있는 편입니다'라는 건 사실입니다.
대부분은 '엘리트 혜민주의'일지언정 베풀려고 하기보단 특권을 혼자 오로지하려고 드니...
가끔 들을 땐 정말 어라? 싶을 정도의 이유까지 가져다 붙이기도 하고 그래서..( '')
햇길린 적도 있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