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7월 23일
임진왜란후의 대마도 정벌론
1598년 임진왜란 종전 직후 조선 조정은 대규모 군사정벌을 논의합니다. 바로 대마도 정벌 계획었습니다. 이 계획은 전라관찰사 황신이 주장했는데 그는 1596년 통신사가 되어 명사와 함께 일본을 오가는 기간 동안 대마도에 머물면서 그곳의 지리와 풍속등 상세한 정보를 획득할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왜란에 보복차원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대마도가 우리땅이라 되찾아야 한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선조 107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2월 21일(임신) 1번째기사
전라도 관찰사 황신이 올린 대마도의 왜적들을 정벌할 것에 대한 상소문
전라도 관찰사 황신이 상소하기를,
“8로의 적추들이 일시에 빠져 나갔습니다. 남쪽 바다에서 승첩을 거두기는 하였지만 이 분을 씻을 수 없으니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중국군이 오늘 돌아간다면 이 적들은 내일 반드시 올 것입니다. 적은 하루에 오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수천 리 밖에서 구원병이 오기를 바란다는 것은 아예 잘못된 계책입니다. 신이 나름대로 생각건대, 대마도는 우리 나라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전부터 우리의 혜택을 받아온 지 오래였다고 봅니다. 그런데 임진 왜란은 실제로 이 적들이 끌어들인 것이니, 오늘날의 계책은 풍신수길의 머리를 베지는 못했지만 차라리 대마도의 적을 모조리 죽여 씨도 남기지 않음으로써 매우 통분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씻어야 할 것입니다. 신이 지난해에 사명을 받고 왜국을 오갈때 이 섬을 경유하면서 그곳의 산천의 형세를 익히 살펴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섬의 주위는 수백 리에 불과할 뿐인데 중간에 배를 정박할 수 있는 곳이 많이 있으며, 육로는 험하고 좁지만 사방에서 넘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른바 부중(府中)이란 곳은 바로 의지(대마도주 종의지)와 조신(평조신)이 거처하는 곳으로 인가가 겨우 3백여 호에 불과합니다. 그밖의 (중략) 8부(部)는 1백여 호에 불과하므로 장정들을 모조리 뽑는다고 하더라도 1천 명도 못될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절강(절강보병, 일명 남병)의 7천∼8천 병력을 선발해 우리 수군과 함께 진주하여 일거에 바다를 건너가 방비가 없을 때 습격한다면 적들은 필시 놀라 무너질 것이니, 이른바 세찬 천둥소리에 미처 귀를 막지 못한다는 격입니다. (중략)
의논하는 자들 중에는 혹은 말하기를 ‘여러 섬의 적들이 필시 와서 구원해줄 것이다.’ 하는데, 이점에 대해서 말하자면 대마도에서 일기도(이키섬)까지의 거리는 5백 리 쯤 되고 일기도에서 평호도(히라도섬)까지 또 1백 30리가 됩니다. 저들이 아무리 빠른 배로 기별을 하더라도 구원병이 나오자면 반드시 순풍을 기다려야 하니, 신속히 공격한다면 우리 뜻대로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의 형세로 보아 스스로 수비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어느 틈에 남의 나라를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중국의 수병이 현재 남쪽 해상에 머물고 있으니 이곳에서 진격하여 정벌한다면 많은 힘을 소비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조정에선 이틀전인 12월 19일, 이미 국방정책에 대한 대략적인 논의가 행해진 상태였습니다. 그날 비변사에서는 '(대마도를) 쳐부수어 크게 위세를 보임으로써 훗날의 근심을 없게 하는 것이야말로 혈기를 가진 사람치고 누구인들 이런 마음이 없겠습니까' 하면서도 고려말 몽골군의 일본침략 실패와 조선초 대마도 정벌의 보잘것 없는 전과, 피폐해진 국내 사정을 들어 외정을 자제하고 재침에 대비해 방비에 힘쓸것을 주장했습니다.
7년 전란으로 쑥대밭이 된 국내사정을 고려했을때 당연한 의견이었는데 황신이 직접적으로 대마도 정벌론을 거론하면서 조정은 또 다시 바빠졌습니다. 바로 다음날(22일) 비변사에서 반론을 제기합니다.
선조 107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2월 22일(계유) 3번째기사
비변사가 병력 동원과 대마도 정벌에 중국 품의를 기다리자고 건의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7년 동안 대치하고 있던 적에게 한 번의 싸움도 이기지 못하고 한 명의 적추도 생포하지 못했을 뿐더러, 끝내 바다에 가득하던 적선으로 하여금 돛을 펴고 돌아가게 했습니다. 노량 싸움에서의 한 차례 승리가 다소나마 사람들의 의기를 북돋우기는 했지만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치욕에 있어서는 털끝만큼도 씻을 수 없습니다. 곧바로 적의 소굴을 쳐부수어 군부의 원수에 보복하고 싶은 것이 신하들의 지극한 심정이니 이 점에 대해 어느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중략)
대마도는 외부의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절해 고도가 아닙니다. 일기도와 낭고도(郞古島)가 멀다고는 하지만 나란히 서로 바라보이는 곳에 있습니다. (중략) 혹시라도 배의 닻을 내려 정박하면서 육지에 올라가 포위하여 습격한다면 저 교활한 적의 간사한 계략을 헤아릴 수 없으니 뜻밖의 변란이 생길까 염려스럽습니다. 설사 일거에 성공하여 뜻대로 되었다고 하더라도 적들은 분심을 품고 독살을 부려 못하는 짓이 없을 것이니, 한번 공격을 받았다고 그들이 두려워하거나 넋이 빠져 다시는 넘볼 생각을 갖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거사로 인하여 10년 동안 무사할 것을 기대하는 것도 신들로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피로한 군사로서는 결코 성공하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그러니 형세상 중국군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중국 장수도 자기가 독단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반드시 중국 조정에 품의(稟議)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복하는 사이에 반드시 오랜 세월이 지체될 것입니다. 이 또한 신들의 지나친 생각입니다.
사실 황신의 계획은 명군, 그것도 명수군을 주력으로 삼겠다는 생각부터 글러먹었다는 생각이 듭니다만(먼산) 아무튼 비변사에선 차근차근 황신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한 다음 전에 주장한데로 소모된 군세를 추스려 방비에 힘쓸것을 주장했습니다. 이종무의 정벌군이 왜군 주력이 대마도를 비운 상태에서 공격했음에도 지휘부의 실책으로 애꿋은 군사 100여명을 떼죽음 시킨 사례가 있는지라 비변사 입장에선 비록 대마도 내의 왜군이 적더라도 쉽게 군사작전을 주장할순 없었을 것입니다.
서로의 주장이 엇갈리자 선조는 바로 결정을 내리는 대신 대신들이 각자 논의해서 의견을 제시해보라고 이릅니다. 조정에선 꽤 활발하게 논의가 벌어졌는데 같은 날 군문에서도 우의정 이덕형을 불러 습격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이덕형은 정벌에 동원될 병사는 약 1만, 항왜병을 동원해 철저히 정탐을 한 다음 풍랑이 잔잔해져 적의 왕래가 활발해지기 전인 정월안에 승부를 봐야 할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대마도를 지킬수 있냐는 물음에는 '쳐부술 수는 있지만 지킬 수는 없다. 다만 천조의 위명을 크게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라고 잘라 말합니다. 당시 군문의 답은 이랬습니다.
선조 107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2월 22일(계유) 4번째기사
우상 이덕형이 대마도 습격 문제에 대해 군문과 이야기 한 내용을 아뢰다
(중략)
“알았다. 거사를 먼저 논할 것이 아니라 정탐부터 먼저 해야 할 것이다. 거사는 논의해서 가부를 결정하는 데 달려 있지만, 정탐하는 일은 반드시 시행해야 하겠다는 마음 가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 점이 전일 전교할 때 정탐을 우선적으로 해야한다고 한 까닭이다. 그런데 내외 조정 신료들은 정탐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즉시 의논하여 결정해 서둘러 시행하지도 않고 있다. (중략) 군사의 기무는 비밀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으로 지하에 깊숙이 숨겨 귀신도 그 기미를 엿볼 수 없게 해야 하는데, 황신의 상소가 이미 전파되었으니, 잇따라 누설되어 천리 밖에까지 전해질까 매우 걱정스럽다. (중략) (적들이 교활해서) 물러간 뒤에도 필시 몰래 정탐해 갔을 것이다. 그리고 대마도에도 반드시 군사를 머물러 두어 황신이 볼 때와는 같지 않을 것이니, 이점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벌을 하고 안하고는 논의를 해서 결정하겠지만 첩보활동은 반드시 해야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져 12월 24일, 항왜병 소기(小棄)와 포로로 끌려갔다 돌아온 조선인 박선을 왜인으로 위장시켜 해로를 조사하게 하고 항왜 소운대(小云大)등에게 후한 상을 내린 다음 대마도를 염탐하게 했습니다. 12월 27일에는 화평을 미끼로 꾀어내거나 아예 납치를 해서라도 대마도인을 잡아다 정보를 얻자는 의견이 나와 선조의 승인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끝이었습니다. 이듬해(1599) 2월 4일 명나라 총병 해생과 선조의 대화에서 대마도에 사람을 보냈냐는 해생의 물음에 (대마도로간) 첩자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선조의 답변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대마도 정벌과 연결지을 만한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전쟁으로 국토가 유린되고 엄청난 인명 손실을 입은 조선으로선 종전후 조선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애썼던 대마도를 상대로 단순히 보복 목적으로 대규모 원정을 감행할 절실한 이유도 없었고 북방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여진족에도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결국 제2차 대마도 정벌론은 중간에 흐지부지되고 끝났습니다.
그러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인건 분명해서 고전소설 '임진록'에는 전란을 일으킨 죄를 묻기위해 김응서와 강홍립이 일본을 정벌하러가는 내용이 나오고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어쨎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게임도 나왔습니다.

# by | 2008/07/23 21:41 | 잡설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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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한 부분이지만, 반면에 살 좀 덧붙여서 양판소 하나 만들어 봐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어이)
전후의, 그것도 점령한 뒤 지킬 수도 없는 땅을 쳐 천조의 위명을 크게 보여줄 뿐이라는 전쟁은 안하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SAGA
그랬겠죠. 하지만 우리땅이 아니니까요./을파소
그렇군요. 한번 찾아봐야 겠습니다./R쟈쟈
저 때 파견되었다는 간자들이 무슨 이공간 너머로 떨어져서
이고깽 식 모험을 벌인다던가 하는 식의 발상... (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