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유진의 난

1594년 갑오년, 전란을 소용돌이속에 과도한 부역과 과세로 피폐해진 남부지방에선 유민들이 속출하고 싸울 의지를 잃고 도망친 군사들이 도적떼가 되어 험조한 곳에 매복하거나 의병을 사칭하며 백성들을 약탈하는 사례가 늘어났습니다. 특히 한강 이남의 경기지역과 호서 지역에서 이런 도적떼가 성행했는데 수령들이 군사를 풀어 토벌해도 일시적인 대책일뿐 곧 다시 모이곤 해서 소탕에 몹시 애를 먹었습니다.

선조 47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월 8일(정해) 2번째기사
충청도에 도적이 치성하니 감사에게 잘 조치하라고 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근일 충청도 내에 도적이 점차 성하여 부자로서 조금이나마 재곡(財穀)을 저축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 창고를 봉해 놓고 쓰지 못하도록 으름장을 놓는다고 하는데, 그 조짐이 우려됩니다. 내부의 급박함이 외적에 못지 않으니 은밀히 감사에게 유시하여 그로 하여금 그때그때 기미를 살펴 특별히 조처하여 후환을 근절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송유진은 30세의 서울 서족 출신 무뢰배로 전쟁을 틈타 역을 피해 도망친 백성들과 사족, 무인일부를 끌어 모은 무리를 이끌고 천안과 직산 사이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다가 주변의 다른 도적떼들을 규합하고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오직 군량과 기계를 모을 뿐이다.”며 의병대장이라 자칭했습니다. 

어느정도 세를 불리는데 성공한 그는 지리산, 속리산, 광덕산, 청계산등에 그들을 배치했습니다. 그러다 동료 오원종에게 도성의 수비가 허술하단 말을 듣고 일당들과 모의해 1월 10일에 군사를 동원하여 아산, 평택 지방의 병기를 빼앗아 가지고 경성에 쳐들어가기로 약속한 다음, 광해군이 이끌던 전주의 분조(分朝)에 다음과 같은 밀서를 보냈습니다.

“임금의 죄악은 고쳐지지 않고 조정의 당쟁은 풀리지 않았다. 부역이 번거롭고 중하여 민생이 불안하다. 목야(牧野)에서 매처럼 드날리니 비록 백이숙제(伯夷叔齊)에게 부끄럼은 있으나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죄인에 벌주니 실로 탕무(하의 걸왕을 몰아낸 탕왕과 은의 주왕을 몰아낸 무왕)에 빛이 되리로다.

송유진 일당의 모의는 충청도 어사 강첨에 의해 조정에 보고됩니다. 

선조 47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월 11일(경인) 4번째기사
충청도 조도 어사 강첨이 송유진 역모의 상황에 대해 보고하다

충청도 조도 어사 강첨이 치계하였다. 
“전 교관(敎官) 유징이 와서 말하기를 ‘목천에 사는 석경천이 「천안의 군기 감관(軍器監官) 송망기·준기와 그의 아비 송흥수가 도적에게 사로잡혀 갔고, 동군의 유춘복·송연복·박순개도 도적에게로 들어갔는데, 어느날 이들이 나와서 동군 사람들에게, 적장의 성(姓)은 이씨인데 그 이름은 말할 수가 없고 현재 청계산에 머물고 있으며 춘천, 해주에 각각 1진씩 주둔하고 있는데 그 여당이 충청도에 산재하여 있고 또 1진은 전라도에 있는데 이달 1월 20일에 거사하려 하며 전라도에 있는 1진은 동궁의 행차를 살피기 위한 것이라는 말로 유인하였다. 」고 했다.’ 하였습니다.

조정에선 병기를 관리하는 관리인 송망기가 잡혀갔다는 소식에 민감히 반응해 즉시 선전관에게 금군을 딸려 파견해 송망기를 추적하게 했습니다.

병사 변양준과 순변사 이일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도적이 있는 지역을 순찰하면서 기회를 보아 체포하라는 명을 내리는 한편 한양에서 가까운 청계산에 주둔하고 있다는 적을 수색하기 위해 방어사 변응성에게 순찰을 핑계로 은밀하게 청계산 일대를 정찰할 것을 지시합니다. 해서민을 보살피기 위해 당시 황해도 해주에 머물고 있던 우의정 유홍에게도 이 사실을 즉각 전달해 도내 군사 훈련 상황과 병기 제작 현황을 상세히 기록해 보고하게 하고, 황해병사 조인득을 시켜 황해도 평산 등지에서 날뛰던 도적떼를 긴급히 체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조정의 발빠른 대응이 무색하게 다음날 송유진과 그 일당의 체포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선조 47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월 12일(신묘) 4번째기사
송유진 등을 체포한 임달신·홍응개 등을 시상하다

적정(賊情)을 진고(進告)한 사람인 직산 좌수 임달신과 적장 송유진(그외 심희수, 오원종, 유춘복, 김천수등)외 10명을 체포한 사람인 홍응개·홍난생·홍우·신계축·홍찬·김응추·홍각등에게 차등 있게 상직(賞職)하였다.
송유진과 그 일당이 모두 체포되었음에도 선조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송유진이 난을 일으키며 판서를 사칭했는데 선조는 이것이 그의 위에 다른 수괴가 있다는 증거로 보았습니다. 이에 성문과 한강의 경비태세를 더욱 철저히 할것을 명하는 한편 남산위에 군사를 보내 사방을 감시하게 했습니다. 또한 병부는 장사들을 뽑아 대오를 나누어 대기하게 했으며 각종 병기를 숫자로 헤아려 궐내로 반입하게 하고 병기의 제조를 담당한 군기시와 왜군이 군량을 쌓아놓던 용산창에도 군사를 배정해 지키게 했습니다. 

어느정도 조치가 치해지자 다시  구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사헌부에선 죄인들을 즉시 서울로 압송할것을 주장했으나 유성룡은 송유진 일당을 서울로 압송하는 과정에서 변고가 생길 수 있고 (선조 생각처럼) 그 곳에 적의 괴수가 있다면 압송을 미루고 군사를 풀어 일망타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선조는 사헌부의 손을들어 선전관, 금군, 금부도사를 파견해 수로를 통해 죄인들을 서울로 압송해오게 합니다.


죄인들이 압송되어 오기 며칠전인 1월 17일, 비변사에서 의병장 이산겸을 반군의 수괴로 지목했습니다.

선조 47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월 17일(병신) 2번째기사
비변사에서 송유진 역모의 괴수로 이산겸을 지목하고 체포할 것을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충청 병사 변양준의 서장을 보건대, 역적 송유진의 초사에 드러난 사람에 대해 그 허실은 알기 어려우나 십분 계책을 강구하여 제때에 체포하여 빠져나가는 적이 없게 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중략)
보령에 사는 이(李)씨 성을 가진 사람은 이산겸인 것 같습니다. 산겸은 일찍이 의병에 투탁하여 거느린 군사가 자못 많았으나 한 사람의 왜적도 체포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난해 중국 사신을 만나기 위해 개성에 와 있었는데 그의 사람됨을 본 이들의 말에 의하면 말솜씨가 상당히 능란했다고 합니다. 그 뒤 호서에서 온 사람들이 하는 말에 따르면 산겸이 모집한 군대가 아직도 그대로 있는데 산속에 쌓아 놓은 군량과 무기 또한 많다고 하였습니다. 
 
이산겸은 충청도 보령출신으로 토정 이지함의 서자로, 임진년에 조헌의 의병군에 참여했으나 2차 금산전투에는 참가하지 않고 살아남아 조헌군의 잔존병력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해온 인물이었습니다. 왜군과의 싸움에선 그리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고 몇번이나 의병을 해산시키고 본가로 돌아갔던 적이 있었으나 강개하고 의기가 있어 사람들의 신임을 얻고 있었습니다. 송유진이 한창 난리 피울때는 전라도에 가있었지요. 보령출신 이씨가 자기 혼자만 있는것도 아닌데 의병일으켜 군사를 이끌고 있어 역적수괴로 지목받았으니 참...

이산겸의 체포명령이 떨어지고 1주일뒤 대궐뜰에서 송유진 일당의 국문이 시작됩니다. 송유진은 반란수괴는 이산겸이고 자신은 아이들 모아놓고 훈장 노릇하다 어쩌다보니 말려들었다고 발뺌했으나 그러나 다른 주모자 격인 김천수, 오원종, 유춘복 등을 국문한 결과, 괴수는 송유진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날 선조는 “적이 이른바 청계산이다, 가야산이다 한 것은 허장 성세로 사람들을 공동시키기 위한 말인 것 같다. 이산겸이 괴수라고 하지만 송유진이 진짜 괴수이다.”라고 결론을 내렸고 홍우, 홍근(송유진의 일당이었으나 마음 바꿔 송유진을 체포한 사람)도 이산겸에 대해선 아는바가 없다고 진술했습니다.

다음날(1월 25일) 다시 열린 국문에서 '도성의 방비가 허술하니 군사 1천 명으로 포위하고 서서 3일간 통곡하면 임금이 반드시 허물을 고칠 것이다.'라고 바람넣은 사람은 오원종이며 침술이 뛰어나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던 그가 사람들 끌어들이는데(혹은 낚는데) 활약했음이 드러났습니다. 2차례에 걸친 국문끝에 송유진 일당이 말만 번지르르 할뿐 그저 규모가 좀 큰 도적떼에 불가하며 그나마도 과장되어 있다는것을 그 좋은 머리로 파악한 선조는 그들을 모두 능치처참에 처하고 가재, 전답, 잡물 등은 그를 체포하는 데 공을 세운 이들에게 분배했습니다.

남은건 송유진 일당에게 속았거나 허위진술로 억울하게 연류된 의병장, 현직 관원, 양반등의 처리문제였습니다. 이산겸, 여대로, 노일개, 조원, 신응희, 김달효, 조희진 등이 있었는데 대부분 석방되었습니다. 한명 빼고...

선조 48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2월 6일(을묘) 2번째기사
송유진 역모와 관련된 죄인 이산겸 등을 친국하다


(중략)
(의병이 좀처럼 모이지 않아)동궁을 호위하려 하다가 전라도의 병사를 모집하는 곳에 자원해볼까 하여 전주·담양을 거쳐 김덕령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정월 15일에 중로에서 충청도에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으나 어떤 도적인지를 몰랐는데 저물녘에 적계(嫡系)로 4촌인 도검찰사(都檢察使) 이산보를 찾아가 만나보니, 산보가 ‘충청의 적을 사람들이 모두 너라고 생각하는데 네가 지금 왔으니 너는 살 길이 있겠다.’ 하였습니다. 나는 무군사(撫軍司)에 직접 나타나고자 하여 드디어 좌의정을 가서 보았고, 또 병조 판서를 보고서 말하기를 ‘상소로 직접 아뢰고자 하나 그 도적의 일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다른 사람의 일이라 지휘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충청 감사가 나를 수금(囚禁)할 때에도 또한 분명히 말하지 않고서 군기를 바치지 않았다는 혐의로 가두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도적의 초사에서 나왔으니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송유진의 얼굴은 전혀 알지도 못하고 그 성명 또한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내가 연소한 서얼로 의병을 거느렸으므로 필시 이 때문에 내 이름을 듣고 끌어댔을 것입니다. 우리 집 문서를 수색해 보아도 전혀 의심스러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상소를 지어 옷 안에 품고 무군사 앞에서 목을 매려 하였으나 이미 도적의 초사에 나왔는데 도피하면 임금을 배반하는 사람이 되겠고 늙은 어미를 버리고 죽으면 어버이를 저버리는 사람이 되겠기에 궐하에 나아가 조용히 죽음의 길로 나아가려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산겸은 처음부터 끝까지 송유진을 모른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란에 동조한 인물들을 제대로 가려내기 위해 불러올린 홍근등도 이산겸에 대해선 아는바가 없다고 진술했으며 선조 본인 입으로도 괴수는 송유진이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근데 왜?

선조 48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2월 14일(계해) 4번째기사
충청도 도적(송유진 역옥)과 관련된 죄인을 친국하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금부도사가 산겸의 주머지에서 편지를 얻었는데 하나는 김덕령이 산겸으로 하여금 모군토록 한 것이며 하나는 산겸이 처자와 영결(永訣)한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일이 옥사에 관계가 있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옥사와는 관계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처음부터 의심하였다. 산겸이 만약 진짜 도적의 괴수였다면 정월 15일의 거사에 어떻게 네 마리 말을 얻어서 전주로 돌아가겠는가. 송적(송유진) 이미 적장인데 그 위에 어찌 다른 사람이 있겠는가. 이것은 송적이 성세(聲勢)를 과장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현혹시킨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산겸은 이미 적의 초사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죽어야 할 따름이다. 나의 이 말은 산겸을 용서해 주려는 것이 아니다.”

 
역적입에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한거 뻔히 알면서 의병장을 두들겨 패죽였습니다. 일본 장수들이 해야 할일을 조선왕이 대신 팔 걷어 붙이고 해주니...권력자들 머리속은 범인과는 달라도 많이 다른 모양입니다.

by rezen | 2008/07/08 22:25 | 잡설 | 트랙백 | 덧글(10)

트랙백 주소 : http://pwt9887.egloos.com/tb/4475487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세월강 at 2008/07/08 22:39
언제나 느끼는거지만 왜 사람들은 정치만 하면 바보가 되는건지 모르겠습니다
Commented by 아롱쿠스 at 2008/07/08 22:59
나중에 이산겸이 군벌로 성장해서 자신을 위협할 것이라고 여겼나 봅니다.

2년후의 김덕령도 마찬가지죠.

사실 왕좌에 있으면 의심이 없을 수가 없죠.

세종대왕은 혹시 예외일까(?)
Commented by 을파소 at 2008/07/08 23:04
명종이 면류관 서보라는 말만 안 했으면 역사가 조금은 바뀌었을까요?
Commented by BigTrain at 2008/07/08 23:16
스스로도 아닌 걸 알면서도 잡아죽이다니...

저러면서 어떻게 왕노릇을 했는지 불가사의하군요. 알던 것보다 더 막장이었네요. -_-;
Commented by R쟈쟈 at 2008/07/08 23:39
머리는 좋고 개념은 안드로메다.....의 전형이죠 하아;

물론 인조보다는 초큼나을지도???
Commented by 현율 at 2008/07/08 23:59
난세에 영웅이 되지 못한 왕은 난세의 영웅을 핍박하기 마련인 걸까요..
Commented by 니트 at 2008/07/09 20:20
저 당시 선조는 뭐 거의 편집증에 걸린게 아닌가 싶더군요..;;;
Commented by paro1923 at 2008/07/10 01:17
선조의 권력 집착은, 어째 이해해 볼려고 해도 그 도가 지나쳤지요.
이미 임란 전에 정여립을 모살한 기축옥사 건도 그렇고,
조금이라도 의심을 못 지우면 결국엔 쳐죽이고 봤으니... (그나마 통상께선 운이 좋으셨지만...)

바보는 아닙니다. 허나, 속 좁고 힘 있는 녀석이 잔머리를 굴리면 바로 저렇게 되지요.
괜히 개인적으로 저 작자를 '조선의 스탈린'이라고 부르는 게 아닙니다. 에잉...
Commented by 아롱쿠스 at 2008/07/10 18:43
결국 부전자전이군요...
Commented by rezen at 2008/07/15 03:54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바보가 될수 있는 사람들이 많더군요./세월강

선조가 좀 안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아롱쿠스

그때 제일 먼저 쓰는게 나았을지도요./을파소

끝내주는 임금입니다./BigTrain

머리는 인조보다 좋아보이더군요./R쟈쟈

선조가 못나게 처신했죠. 물론 그런 사례들은 찾아보면 많습니다만.../현율

자기자리 지키는데 혈안이 되었죠./니트

머리는 좋은데 질투랑 의심이 너무 많았습니다./paro1923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