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후의 대마도 정벌론

1598년 임진왜란 종전 직후 조선 조정은 대규모 군사정벌을 논의합니다. 바로 대마도 정벌 계획었습니다. 이 계획은 전라관찰사 황신이 주장했는데 그는 1596년 통신사가 되어 명사와 함께 일본을 오가는 기간 동안 대마도에 머물면서 그곳의 지리와 풍속등 상세한 정보를 획득할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왜란에 보복차원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대마도가 우리땅이라 되찾아야 한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선조 107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2월 21일(임신) 1번째기사
전라도 관찰사 황신이 올린 대마도의 왜적들을 정벌할 것에 대한 상소문


전라도 관찰사 황신이 상소하기를,
 
“8로의 적추들이 일시에 빠져 나갔습니다. 남쪽 바다에서 승첩을 거두기는 하였지만 이 분을 씻을 수 없으니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중국군이 오늘 돌아간다면 이 적들은 내일 반드시 올 것입니다. 적은 하루에 오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수천 리 밖에서 구원병이 오기를 바란다는 것은 아예 잘못된 계책입니다. 신이 나름대로 생각건대, 대마도는 우리 나라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전부터 우리의 혜택을 받아온 지 오래였다고 봅니다. 그런데 임진 왜란은 실제로 이 적들이 끌어들인 것이니, 오늘날의 계책은 풍신수길의 머리를 베지는 못했지만 차라리 대마도의 적을 모조리 죽여 씨도 남기지 않음으로써 매우 통분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씻어야 할 것입니다. 신이 지난해에 사명을 받고 왜국을 오갈때 이 섬을 경유하면서 그곳의 산천의 형세를 익히 살펴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섬의 주위는 수백 리에 불과할 뿐인데 중간에 배를 정박할 수 있는 곳이 많이 있으며, 육로는 험하고 좁지만 사방에서 넘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른바 부중(府中)이란 곳은 바로 의지(대마도주 종의지)와 조신(평조신)이 거처하는 곳으로 인가가 겨우 3백여 호에 불과합니다. 그밖의 (중략) 8부(部)는 1백여 호에 불과하므로 장정들을 모조리 뽑는다고 하더라도 1천 명도 못될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절강(절강보병, 일명 남병)의 7천∼8천 병력을 선발해 우리 수군과 함께 진주하여 일거에 바다를 건너가 방비가 없을 때 습격한다면 적들은 필시 놀라 무너질 것이니, 이른바 세찬 천둥소리에 미처 귀를 막지 못한다는 격입니다. (중략)
 
의논하는 자들 중에는 혹은 말하기를 ‘여러 섬의 적들이 필시 와서 구원해줄 것이다.’ 하는데, 이점에 대해서 말하자면 대마도에서 일기도(이키섬)까지의 거리는 5백 리 쯤 되고 일기도에서 평호도(히라도섬)까지 또 1백 30리가 됩니다. 저들이 아무리 빠른 배로 기별을 하더라도 구원병이 나오자면 반드시 순풍을 기다려야 하니, 신속히 공격한다면 우리 뜻대로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의 형세로 보아 스스로 수비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어느 틈에 남의 나라를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중국의 수병이 현재 남쪽 해상에 머물고 있으니 이곳에서 진격하여 정벌한다면 많은 힘을 소비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조정에선 이틀전인 12월 19일, 이미 국방정책에 대한 대략적인 논의가 행해진 상태였습니다. 그날 비변사에서는 '(대마도를) 쳐부수어 크게 위세를 보임으로써 훗날의 근심을 없게 하는 것이야말로 혈기를 가진 사람치고 누구인들 이런 마음이 없겠습니까' 하면서도 고려말 몽골군의 일본침략 실패와 조선초 대마도 정벌의 보잘것 없는 전과, 피폐해진 국내 사정을 들어 외정을 자제하고 재침에 대비해 방비에 힘쓸것을 주장했습니다. 

7년 전란으로 쑥대밭이 된 국내사정을 고려했을때 당연한 의견이었는데 황신이 직접적으로 대마도 정벌론을 거론하면서 조정은 또 다시 바빠졌습니다. 바로 다음날(22일) 비변사에서 반론을 제기합니다.

선조 107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2월 22일(계유) 3번째기사
비변사가 병력 동원과 대마도 정벌에 중국 품의를 기다리자고 건의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7년 동안 대치하고 있던 적에게 한 번의 싸움도 이기지 못하고 한 명의 적추도 생포하지 못했을 뿐더러, 끝내 바다에 가득하던 적선으로 하여금 돛을 펴고 돌아가게 했습니다. 노량 싸움에서의 한 차례 승리가 다소나마 사람들의 의기를 북돋우기는 했지만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치욕에 있어서는 털끝만큼도 씻을 수 없습니다. 곧바로 적의 소굴을 쳐부수어 군부의 원수에 보복하고 싶은 것이 신하들의 지극한 심정이니 이 점에 대해 어느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중략)
 
대마도는 외부의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절해 고도가 아닙니다. 일기도와 낭고도(郞古島)가 멀다고는 하지만 나란히 서로 바라보이는 곳에 있습니다. (중략) 혹시라도 배의 닻을 내려 정박하면서 육지에 올라가 포위하여 습격한다면 저 교활한 적의 간사한 계략을 헤아릴 수 없으니 뜻밖의 변란이 생길까 염려스럽습니다. 설사 일거에 성공하여 뜻대로 되었다고 하더라도 적들은 분심을 품고 독살을 부려 못하는 짓이 없을 것이니, 한번 공격을 받았다고 그들이 두려워하거나 넋이 빠져 다시는 넘볼 생각을 갖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거사로 인하여 10년 동안 무사할 것을 기대하는 것도 신들로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피로한 군사로서는 결코 성공하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그러니 형세상 중국군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중국 장수도 자기가 독단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반드시 중국 조정에 품의(稟議)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복하는 사이에 반드시 오랜 세월이 지체될 것입니다. 이 또한 신들의 지나친 생각입니다. 

사실 황신의 계획은 명군, 그것도 명수군을 주력으로 삼겠다는 생각부터 글러먹었다는 생각이 듭니다만(먼산) 아무튼 비변사에선 차근차근 황신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한 다음 전에 주장한데로 소모된 군세를 추스려 방비에 힘쓸것을 주장했습니다. 이종무의 정벌군이 왜군 주력이 대마도를 비운 상태에서 공격했음에도 지휘부의 실책으로 애꿋은 군사 100여명을 떼죽음 시킨 사례가 있는지라 비변사 입장에선 비록 대마도 내의 왜군이 적더라도 쉽게 군사작전을 주장할순 없었을 것입니다.

서로의 주장이 엇갈리자 선조는 바로 결정을 내리는 대신 대신들이 각자 논의해서 의견을 제시해보라고 이릅니다. 조정에선 꽤 활발하게 논의가 벌어졌는데 같은 날 군문에서도 우의정 이덕형을 불러 습격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이덕형은 정벌에 동원될 병사는 약 1만, 항왜병을 동원해 철저히 정탐을 한 다음 풍랑이 잔잔해져 적의 왕래가 활발해지기 전인 정월안에 승부를 봐야 할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대마도를 지킬수 있냐는 물음에는 '쳐부술 수는 있지만 지킬 수는 없다. 다만 천조의 위명을 크게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라고 잘라 말합니다. 당시 군문의 답은 이랬습니다.

선조 107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2월 22일(계유) 4번째기사
우상 이덕형이 대마도 습격 문제에 대해 군문과 이야기 한 내용을 아뢰다

(중략)

“알았다. 거사를 먼저 논할 것이 아니라 정탐부터 먼저 해야 할 것이다. 거사는 논의해서 가부를 결정하는 데 달려 있지만, 정탐하는 일은 반드시 시행해야 하겠다는 마음 가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 점이 전일 전교할 때 정탐을 우선적으로 해야한다고 한 까닭이다. 그런데 내외 조정 신료들은 정탐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즉시 의논하여 결정해 서둘러 시행하지도 않고 있다. (중략) 군사의 기무는 비밀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으로 지하에 깊숙이 숨겨 귀신도 그 기미를 엿볼 수 없게 해야 하는데, 황신의 상소가 이미 전파되었으니, 잇따라 누설되어 천리 밖에까지 전해질까 매우 걱정스럽다. (중략) (적들이 교활해서) 물러간 뒤에도 필시 몰래 정탐해 갔을 것이다. 그리고 대마도에도 반드시 군사를 머물러 두어 황신이 볼 때와는 같지 않을 것이니, 이점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벌을 하고 안하고는 논의를 해서 결정하겠지만 첩보활동은 반드시 해야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져 12월 24일, 항왜병 소기(小棄)와 포로로 끌려갔다 돌아온 조선인 박선을 왜인으로 위장시켜 해로를 조사하게 하고 항왜 소운대(小云大)등에게 후한 상을 내린 다음 대마도를 염탐하게 했습니다. 12월 27일에는 화평을 미끼로 꾀어내거나 아예 납치를 해서라도 대마도인을 잡아다 정보를 얻자는 의견이 나와 선조의 승인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끝이었습니다. 이듬해(1599) 2월 4일 명나라 총병 해생과 선조의 대화에서 대마도에 사람을 보냈냐는 해생의 물음에 (대마도로간) 첩자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선조의 답변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대마도 정벌과 연결지을 만한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전쟁으로 국토가 유린되고 엄청난 인명 손실을 입은 조선으로선 종전후 조선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애썼던 대마도를 상대로 단순히 보복 목적으로 대규모 원정을 감행할 절실한 이유도 없었고 북방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여진족에도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결국 제2차 대마도 정벌론은 중간에 흐지부지되고 끝났습니다.

그러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인건 분명해서 고전소설 '임진록'에는 전란을 일으킨 죄를 묻기위해 김응서와 강홍립이 일본을 정벌하러가는 내용이 나오고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어쨎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게임도 나왔습니다.
 

<임진록2+ 조선의 반격>

by rezen | 2008/07/23 21:41 | 잡설 | 트랙백 | 덧글(1)

컴퓨터 성능에 절망할때...

역사 포스팅을 하려고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를 찾았더니 홈페이지에 서버오류가 생겨 이용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난주 진주-통영-여수-경주 일정으로 여행하면서 디카를 얻어다 사진을 몇장 찍었습니다. 찍사의 실력이 형편없고 날도 더워서 카메라 넜다 뺐다 하기가 성가셔셔 많이 찍진않았고 한 20여장 정도입니다. 오늘 블로그에 올리고 간단히 설명을 붙여서 포스팅하려고 했는데

이노무 컴퓨터가 처음에 사진이 담긴 CD를 넣으려 할때부터 제대로 열리지 않고 반항을 하더니 CD를 제대로 못읽어서 다시 한 10분 버티고 그 다음부턴 사진파일만 불러오려고 하면 다운을 먹어버립니다. 일부러 팜플렛까지 전부 챙겨왔더만...

전부터 상태가 그렇게 좋진 않아서 참고 어떻게든 포스팅 해보려고 했는데 다운 먹는 횟수가 10번을 넘어가니 그냥 포기하고 싶네요. 폰카로도 몇장 찍었는데 폰카도 파일을 불러오려니 다운 먹고 굳어버리네요. 후유...

by rezen | 2008/07/22 23:06 | 기타 잡다한것 | 트랙백 | 덧글(4)

대마도 우리땅 운운이 욕을 먹는건...

82년 전부터 계획된 동북공정

대륙 좋아하고 고조선, 고구려의 영토를 턱없이 과장시키는 사람들이 백세 무병장수할 정도로 욕을 얻어 먹었던 이유는 그들의 주장이 근거없는 낭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사람들이 추구해온 본래의 순수한 의도를 진창에 빠뜨릴뿐 아니라 쓸데없는 빌미만 제공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대마도도 우리땅

그래도 백제가 강남을 400년간 통치하고운운은 사학계 정설이 아닌 비주류들 주장입니다. 근데 저 대마도 운운은 현재 국회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가진 여당의 주장이니 더욱 문제입니다.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가장 큰 근거가 "대한민국이 50년간 실효지배를 해온땅이다."인데 조선시대 잠깐 정벌한거빼고 몇백년간 일본의 영향아래 있었던 대마도를 우리땅이라고 우기면 그동안 실효지배 운운한게 뭐가 되겠습니까.

우리땅 독도를 지키기 위해선 좀 역사왜곡에 부정한 짓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어쩌면 정말 그렇다고 믿고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순간, 독도를 지키겠다는 순수한 의도는 흐려지고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는건 생각 안하는듯 합니다. 그래서야 그렇게 욕하는 중화주의, 일본극우들과 다를게 뭐냐구요? 그들의 주장이 우리의 영토와 역사, 주권을 침해하니 그에 맞서자는건데 인터넷 키워도 아닌 국정을 이끌어가는 분들이 그들이랑 똑같이 왕왕거리면 어쩌라구요.

정말 독도를 지키고 싶으면 독도가 왜 우리땅인지 알리고 제대로 가르치는 일부터 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길에 나가 독도가 왜 우리땅이냐고 물으면 제대로 대답할 사람은 의외로 적을겁니다.

한나라당을 지지하건 지지하지 않건 독도는 국민 모두의 문제고 잘못되면 국제망신, 자칫 후손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될순 있으니 잘해주길 빌어야 하는데... 독도에 호텔? 세계에서 제일 작은 호텔 기네스에 도전하려는 걸까요 아니면 독도 앞바다에 시멘트라도 갖다 붓겠다는 걸까요? 찌라시 표퓰리즘도 정도껏 해야지  

by rezen | 2008/07/20 22:17 | 기타 잡다한것 | 트랙백 | 덧글(13)

여수입니다.

어제 아침 일찍 출발해 진주성을 둘러본 다음 부리나케 통영으로 향했습니다.

날이 좀 덥긴 했지만 돈을 들인만큼 본전을 찾자는 생각에 열심히 돌아다녔습니다. 마침 통영은 향토역사관, 세병관, 충렬사, 문하마당, 남망산등 주요 관광지가 대부분 인접해 있어서 도보로도 충분히 하루만에 관람이 가능하더군요. 다만, 남망산 조각공원에 갈때 카메라를 빼먹어서 충무공 동상(1953년) 못찍은게 아쉽습니다.   

오늘은 아침에 한산도로 가서 제승당을 둘러본 다음(한산도는 제대로 관광하려면 반드시 자가용을 가져가는게 좋습니다.) 진주-순천을 거쳐서 여수에 도착했습니다. 

다 그런건 아니겠지만 순천도 여수도 명색 시인데 참 한산하고 뭔가 좀 투박해 보이고 시골느낌이 납니다. 내일 아침에 진남관과 타루비, 좌수영대첩비를 둘러본 다음 경주로 갈 생각입니다. 충주는 버스요금 비싸기만 비싸고 숙박, 교통이 불편하고 배차 시간이 어정쩡해서 일정 다 말아먹겠다 싶어서 다음 기회로 미뤘습니다. 기왕에 혼자 여행하는데 좀 여유를 가지고 하고 싶습니다. 

통영에서 묵었던 여관은 숙박비가 저렴한 대신 '여기 3층인데 불나면 어디로 도망가지? 저 아래로 뛰어내릴까? 창문은 열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곳이었는데 지금 머무르고 있는 모텔방은 넓은 크기, 에어컨, 인터넷까지 TV화질 안좋은거 빼고는 흠잡을게  없네요. 어제 점심, 오늘 아침 굶고 이틀간 김밥순례를 한 보람이 있어요. 내일은 어느 김밥집을 갈까...근데 아침은 먹을수 있을까?

by rezen | 2008/07/17 23:56 | 기타 잡다한것 | 트랙백 | 덧글(5)

여행계획을 세웠습니다.

여름 방학을 맞아 유적답사 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자금 사정으로 멀리는 못가고 대중교통으로 김해(출발) -> 진주-> 통영->여수-> 충주-> 부산을 거쳐 김해에 도착하는 일정입니다. 주로 임진왜란 관련 유적들을 살펴보고 충주에선 중원고구려비와 충주박물관등 여기저기 돌아다녀볼 계획입니다.   


입장료는 대개 국립, 도립, 시립 관광지라 그다지 큰 타격을 입힐 것 같진 않은데 문제는 교통비와 식비, 숙박비입니다. 교통비는 계산이 끝났는데 식비는...계산이 잘 안나오네요. 마침 날도 더워서 시원한 군것질거리에 손이 가기도 쉽고 말입니다. 매끼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건 사치고 그렇다고 면식수행은 싫고해서 여행지 근처 김밥천국 위치를 체크해놓았습니다. 숙박비는 다리 밑에서 잘순 없고 하루에 2~3만원 하는 여관에서 계속 잘려니 돈이 아까워서(-_-;) 찜질방이나 값이 싼 유스호텔을 이용할 생각입니다.

진주-진주성, 진주박물관
통영-향토역사관, 세병관, 충렬사, 착량묘, 한산도
여수-충렬사, 진남관, 타루비&좌수영대첩비
충주-탄금대, 중원고구려비, 충주박물관, 기타 불교유적

내일 출발할 예정입니다. 바람이 좀 불고 날씨가 덜 더우면 좋을텐데 말이죠.

by rezen | 2008/07/15 21:59 | 트랙백 | 덧글(6)

적벽대전 봤습니다.

조조활인으로 싸게 보고왔습니다. 초반에 너무 질질끈다 싶더니 시리즈물이더군요. 후속작은 연말에 개봉한답니다. 이번 편은 딱 적벽대전 시작하는 부분까지 다룹니다. 스토리는 연의 바탕으로한 오리지널이구요. 상당히 심플한 내용인데 해외시장을 노리는 모양입니다.(돈을 800억이나 때려부었으니...)

등장인물들을 살펴보면


주유: 주유인지 여포인지 아주 날라다닙니다.

감녕: 같이 날라다닙니다.


유비: 서민...좀 찌질해요.

관우: 무적 승마보병, 장판파전투에서 조조군에 포위당했다 조조의 배려로 살아남습니다. 화용도 일화가 나올게 분명한데 그냥 나오면 삼국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해를 못할테니 일부러 장판파에서 오리지널 스토리를 집어넣은 모양입니다. 용의 부활에서 관우역을 맡은 적룡이나 84부작 삼국지 드라마 관우보단 중후한 맛이 떨어져 보였습니다.   

장비: 전신이 무기, 서예에 익혔다는 점은 정사를 참고한듯 합니다.

조운: 초반부터 대부분의 액션을 맡고있습니다. 배우가 떡대가 좋아 힘쓰는 역에 잘 맞아 떨어진것 같습니다. 


조조: 거만+색마+색골+색귀+포악+양민학살+악질 스토커

위나라 장수들: 존재감 없음, 판소리 적벽가 만큼이나 안습입니다. 그나마 개념있게 나오는게 채모더군요.

그외

-그놈의 비둘기...후반부부터 아주 본격적으로 날라다닙니다. 대체 전생에 비둘기랑 무슨 인연이길래?

-비둘기 말고도 새, 말, 호랑이, 거북이까지 동물 종합선물세트.

-당연한 말이지만 중궈는 No CG, 스케일입니다.

-장면전환이 좀 매끄럽지 못합니다.

by rezen | 2008/07/11 13:11 | 기타 잡다한것 | 트랙백 | 덧글(8)

송유진의 난

1594년 갑오년, 전란을 소용돌이속에 과도한 부역과 과세로 피폐해진 남부지방에선 유민들이 속출하고 싸울 의지를 잃고 도망친 군사들이 도적떼가 되어 험조한 곳에 매복하거나 의병을 사칭하며 백성들을 약탈하는 사례가 늘어났습니다. 특히 한강 이남의 경기지역과 호서 지역에서 이런 도적떼가 성행했는데 수령들이 군사를 풀어 토벌해도 일시적인 대책일뿐 곧 다시 모이곤 해서 소탕에 몹시 애를 먹었습니다.

선조 47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월 8일(정해) 2번째기사
충청도에 도적이 치성하니 감사에게 잘 조치하라고 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근일 충청도 내에 도적이 점차 성하여 부자로서 조금이나마 재곡(財穀)을 저축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 창고를 봉해 놓고 쓰지 못하도록 으름장을 놓는다고 하는데, 그 조짐이 우려됩니다. 내부의 급박함이 외적에 못지 않으니 은밀히 감사에게 유시하여 그로 하여금 그때그때 기미를 살펴 특별히 조처하여 후환을 근절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송유진은 30세의 서울 서족 출신 무뢰배로 전쟁을 틈타 역을 피해 도망친 백성들과 사족, 무인일부를 끌어 모은 무리를 이끌고 천안과 직산 사이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다가 주변의 다른 도적떼들을 규합하고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오직 군량과 기계를 모을 뿐이다.”며 의병대장이라 자칭했습니다. 

어느정도 세를 불리는데 성공한 그는 지리산, 속리산, 광덕산, 청계산등에 그들을 배치했습니다. 그러다 동료 오원종에게 도성의 수비가 허술하단 말을 듣고 일당들과 모의해 1월 10일에 군사를 동원하여 아산, 평택 지방의 병기를 빼앗아 가지고 경성에 쳐들어가기로 약속한 다음, 광해군이 이끌던 전주의 분조(分朝)에 다음과 같은 밀서를 보냈습니다.

“임금의 죄악은 고쳐지지 않고 조정의 당쟁은 풀리지 않았다. 부역이 번거롭고 중하여 민생이 불안하다. 목야(牧野)에서 매처럼 드날리니 비록 백이숙제(伯夷叔齊)에게 부끄럼은 있으나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죄인에 벌주니 실로 탕무(하의 걸왕을 몰아낸 탕왕과 은의 주왕을 몰아낸 무왕)에 빛이 되리로다.

송유진 일당의 모의는 충청도 어사 강첨에 의해 조정에 보고됩니다. 

선조 47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월 11일(경인) 4번째기사
충청도 조도 어사 강첨이 송유진 역모의 상황에 대해 보고하다

충청도 조도 어사 강첨이 치계하였다. 
“전 교관(敎官) 유징이 와서 말하기를 ‘목천에 사는 석경천이 「천안의 군기 감관(軍器監官) 송망기·준기와 그의 아비 송흥수가 도적에게 사로잡혀 갔고, 동군의 유춘복·송연복·박순개도 도적에게로 들어갔는데, 어느날 이들이 나와서 동군 사람들에게, 적장의 성(姓)은 이씨인데 그 이름은 말할 수가 없고 현재 청계산에 머물고 있으며 춘천, 해주에 각각 1진씩 주둔하고 있는데 그 여당이 충청도에 산재하여 있고 또 1진은 전라도에 있는데 이달 1월 20일에 거사하려 하며 전라도에 있는 1진은 동궁의 행차를 살피기 위한 것이라는 말로 유인하였다. 」고 했다.’ 하였습니다.

조정에선 병기를 관리하는 관리인 송망기가 잡혀갔다는 소식에 민감히 반응해 즉시 선전관에게 금군을 딸려 파견해 송망기를 추적하게 했습니다.

병사 변양준과 순변사 이일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도적이 있는 지역을 순찰하면서 기회를 보아 체포하라는 명을 내리는 한편 한양에서 가까운 청계산에 주둔하고 있다는 적을 수색하기 위해 방어사 변응성에게 순찰을 핑계로 은밀하게 청계산 일대를 정찰할 것을 지시합니다. 해서민을 보살피기 위해 당시 황해도 해주에 머물고 있던 우의정 유홍에게도 이 사실을 즉각 전달해 도내 군사 훈련 상황과 병기 제작 현황을 상세히 기록해 보고하게 하고, 황해병사 조인득을 시켜 황해도 평산 등지에서 날뛰던 도적떼를 긴급히 체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조정의 발빠른 대응이 무색하게 다음날 송유진과 그 일당의 체포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선조 47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월 12일(신묘) 4번째기사
송유진 등을 체포한 임달신·홍응개 등을 시상하다

적정(賊情)을 진고(進告)한 사람인 직산 좌수 임달신과 적장 송유진(그외 심희수, 오원종, 유춘복, 김천수등)외 10명을 체포한 사람인 홍응개·홍난생·홍우·신계축·홍찬·김응추·홍각등에게 차등 있게 상직(賞職)하였다.
송유진과 그 일당이 모두 체포되었음에도 선조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송유진이 난을 일으키며 판서를 사칭했는데 선조는 이것이 그의 위에 다른 수괴가 있다는 증거로 보았습니다. 이에 성문과 한강의 경비태세를 더욱 철저히 할것을 명하는 한편 남산위에 군사를 보내 사방을 감시하게 했습니다. 또한 병부는 장사들을 뽑아 대오를 나누어 대기하게 했으며 각종 병기를 숫자로 헤아려 궐내로 반입하게 하고 병기의 제조를 담당한 군기시와 왜군이 군량을 쌓아놓던 용산창에도 군사를 배정해 지키게 했습니다. 

어느정도 조치가 치해지자 다시  구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사헌부에선 죄인들을 즉시 서울로 압송할것을 주장했으나 유성룡은 송유진 일당을 서울로 압송하는 과정에서 변고가 생길 수 있고 (선조 생각처럼) 그 곳에 적의 괴수가 있다면 압송을 미루고 군사를 풀어 일망타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선조는 사헌부의 손을들어 선전관, 금군, 금부도사를 파견해 수로를 통해 죄인들을 서울로 압송해오게 합니다.


죄인들이 압송되어 오기 며칠전인 1월 17일, 비변사에서 의병장 이산겸을 반군의 수괴로 지목했습니다.

선조 47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월 17일(병신) 2번째기사
비변사에서 송유진 역모의 괴수로 이산겸을 지목하고 체포할 것을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충청 병사 변양준의 서장을 보건대, 역적 송유진의 초사에 드러난 사람에 대해 그 허실은 알기 어려우나 십분 계책을 강구하여 제때에 체포하여 빠져나가는 적이 없게 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중략)
보령에 사는 이(李)씨 성을 가진 사람은 이산겸인 것 같습니다. 산겸은 일찍이 의병에 투탁하여 거느린 군사가 자못 많았으나 한 사람의 왜적도 체포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난해 중국 사신을 만나기 위해 개성에 와 있었는데 그의 사람됨을 본 이들의 말에 의하면 말솜씨가 상당히 능란했다고 합니다. 그 뒤 호서에서 온 사람들이 하는 말에 따르면 산겸이 모집한 군대가 아직도 그대로 있는데 산속에 쌓아 놓은 군량과 무기 또한 많다고 하였습니다. 
 
이산겸은 충청도 보령출신으로 토정 이지함의 서자로, 임진년에 조헌의 의병군에 참여했으나 2차 금산전투에는 참가하지 않고 살아남아 조헌군의 잔존병력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해온 인물이었습니다. 왜군과의 싸움에선 그리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고 몇번이나 의병을 해산시키고 본가로 돌아갔던 적이 있었으나 강개하고 의기가 있어 사람들의 신임을 얻고 있었습니다. 송유진이 한창 난리 피울때는 전라도에 가있었지요. 보령출신 이씨가 자기 혼자만 있는것도 아닌데 의병일으켜 군사를 이끌고 있어 역적수괴로 지목받았으니 참...

이산겸의 체포명령이 떨어지고 1주일뒤 대궐뜰에서 송유진 일당의 국문이 시작됩니다. 송유진은 반란수괴는 이산겸이고 자신은 아이들 모아놓고 훈장 노릇하다 어쩌다보니 말려들었다고 발뺌했으나 그러나 다른 주모자 격인 김천수, 오원종, 유춘복 등을 국문한 결과, 괴수는 송유진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날 선조는 “적이 이른바 청계산이다, 가야산이다 한 것은 허장 성세로 사람들을 공동시키기 위한 말인 것 같다. 이산겸이 괴수라고 하지만 송유진이 진짜 괴수이다.”라고 결론을 내렸고 홍우, 홍근(송유진의 일당이었으나 마음 바꿔 송유진을 체포한 사람)도 이산겸에 대해선 아는바가 없다고 진술했습니다.

다음날(1월 25일) 다시 열린 국문에서 '도성의 방비가 허술하니 군사 1천 명으로 포위하고 서서 3일간 통곡하면 임금이 반드시 허물을 고칠 것이다.'라고 바람넣은 사람은 오원종이며 침술이 뛰어나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던 그가 사람들 끌어들이는데(혹은 낚는데) 활약했음이 드러났습니다. 2차례에 걸친 국문끝에 송유진 일당이 말만 번지르르 할뿐 그저 규모가 좀 큰 도적떼에 불가하며 그나마도 과장되어 있다는것을 그 좋은 머리로 파악한 선조는 그들을 모두 능치처참에 처하고 가재, 전답, 잡물 등은 그를 체포하는 데 공을 세운 이들에게 분배했습니다.

남은건 송유진 일당에게 속았거나 허위진술로 억울하게 연류된 의병장, 현직 관원, 양반등의 처리문제였습니다. 이산겸, 여대로, 노일개, 조원, 신응희, 김달효, 조희진 등이 있었는데 대부분 석방되었습니다. 한명 빼고...

선조 48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2월 6일(을묘) 2번째기사
송유진 역모와 관련된 죄인 이산겸 등을 친국하다


(중략)
(의병이 좀처럼 모이지 않아)동궁을 호위하려 하다가 전라도의 병사를 모집하는 곳에 자원해볼까 하여 전주·담양을 거쳐 김덕령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정월 15일에 중로에서 충청도에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으나 어떤 도적인지를 몰랐는데 저물녘에 적계(嫡系)로 4촌인 도검찰사(都檢察使) 이산보를 찾아가 만나보니, 산보가 ‘충청의 적을 사람들이 모두 너라고 생각하는데 네가 지금 왔으니 너는 살 길이 있겠다.’ 하였습니다. 나는 무군사(撫軍司)에 직접 나타나고자 하여 드디어 좌의정을 가서 보았고, 또 병조 판서를 보고서 말하기를 ‘상소로 직접 아뢰고자 하나 그 도적의 일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다른 사람의 일이라 지휘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충청 감사가 나를 수금(囚禁)할 때에도 또한 분명히 말하지 않고서 군기를 바치지 않았다는 혐의로 가두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도적의 초사에서 나왔으니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송유진의 얼굴은 전혀 알지도 못하고 그 성명 또한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내가 연소한 서얼로 의병을 거느렸으므로 필시 이 때문에 내 이름을 듣고 끌어댔을 것입니다. 우리 집 문서를 수색해 보아도 전혀 의심스러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상소를 지어 옷 안에 품고 무군사 앞에서 목을 매려 하였으나 이미 도적의 초사에 나왔는데 도피하면 임금을 배반하는 사람이 되겠고 늙은 어미를 버리고 죽으면 어버이를 저버리는 사람이 되겠기에 궐하에 나아가 조용히 죽음의 길로 나아가려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산겸은 처음부터 끝까지 송유진을 모른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란에 동조한 인물들을 제대로 가려내기 위해 불러올린 홍근등도 이산겸에 대해선 아는바가 없다고 진술했으며 선조 본인 입으로도 괴수는 송유진이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근데 왜?

선조 48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2월 14일(계해) 4번째기사
충청도 도적(송유진 역옥)과 관련된 죄인을 친국하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금부도사가 산겸의 주머지에서 편지를 얻었는데 하나는 김덕령이 산겸으로 하여금 모군토록 한 것이며 하나는 산겸이 처자와 영결(永訣)한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일이 옥사에 관계가 있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옥사와는 관계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처음부터 의심하였다. 산겸이 만약 진짜 도적의 괴수였다면 정월 15일의 거사에 어떻게 네 마리 말을 얻어서 전주로 돌아가겠는가. 송적(송유진) 이미 적장인데 그 위에 어찌 다른 사람이 있겠는가. 이것은 송적이 성세(聲勢)를 과장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현혹시킨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산겸은 이미 적의 초사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죽어야 할 따름이다. 나의 이 말은 산겸을 용서해 주려는 것이 아니다.”

 
역적입에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한거 뻔히 알면서 의병장을 두들겨 패죽였습니다. 일본 장수들이 해야 할일을 조선왕이 대신 팔 걷어 붙이고 해주니...권력자들 머리속은 범인과는 달라도 많이 다른 모양입니다.

by rezen | 2008/07/08 22:25 | 잡설 | 트랙백 | 덧글(10)

핸콕(네타있음)

본래 강철중을 보려고 했으나 함께간 친구둘이 바득바득 우기는 바람에 핸콕을 보게되었습니다. 예고편만 봤을때는 엄청 강력하지만 성격 까칠한 슈퍼히어로가 개과천선하는 액션 히어로물로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중간까진 그렇게 되었구요.

전반부 스토리를 요약하면 슈퍼히어로지만 알콜중독에 성격파탄인 핸콕은 항상 선행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범죄자가 입히는 것보다 더 심각한 피해로 LA를 뒤집어 놓아 끊임없이 욕을 얻어먹고, 미움받고, 고소를 당합니다. 그러다 자기가 한 번 구해주었던 한 PR 전문가의 설득으로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 이미지 변신을 꾀하게되죠...여기까진 그런데로 괜찮았습니다. 그렇게 개과천선해서 은행강도 때려잡을때만 해도 이제 도시를 위협하는 대악당이 나타나고 핸콕이 때려 잡을줄 알았죠.

그런데 왠걸 알고보니 친구인 PR전문가 아내가 자기랑 한쌍으로 태어난 슈퍼 히어로라는 뜬금없는 전개가 벌어지더니 이후 히어로도 스토리도 같이 힘을 잃고 비실비실 거리며 엉뚱한곳으로 흘러가버립니다.

히어물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인 악역 캐릭터들은 '왜 태어났니~' 수준의 칼없스마를 자랑하는데 악당 두목인 스탠버드 교수출신 은행털이범은 PR전문가가 휘두른 도끼로 이마 까이기 전까지 얼굴보여준게 한 10분이나 되려나 모르겠고 그밑에 똘마니둘은 마지막 1초까지 재면 5분 정도 나왔을겁니다. 그 두목이 어째서 핸콕이 수천년 전부터 오래오래 살아온걸 알고있는지, 핸콕과 옛 연인(PR전문가 아내)을 몇번이나 습격했던 '그들' 이 누군지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히어로물 주제에 시작부분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액션도 없고 그 액션도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헐크같은 요 몇년사이 개봉한 다른 히어로 영화들과 비교하면 귀여운 수준입니다.

결론

누구보다도 사랑받고 싶어하지만 다가서는 방법을 모르는 고독한 슈퍼히어로의 짠하고 유머러스한 이야기가 좋으신 분. 윌 스미스의 뛰어난 연기를 감상하고 싶으신 분께 추천합니다.

혜성같이 나타나 강력한 힘을가진 악당들을 처단하는 일반적인 히어로 영화를 원하시는 분들께는 비추천입니다.

by rezen | 2008/07/03 16:55 | 기타 잡다한것 | 트랙백 | 덧글(2)

나의 전생테스트

을파소의 전생

을파소님 이글루서 트랙백합니다. 닉네임이랑 이것저것 넣어보는 분들도 계시던데 전 그냥 생년원일에 본명 하나만 가지고 해봤습니다. 하시는곳은 여기입니다. 결과는...

꽤 리얼계군요. 확실히 아기는 엄마젖 먹을때가 제일 행복하고 못먹을때가 제일 불행하겠죠.

근데 같은 세상에 영혼이 2개면 이놈같이?

푸하하

by rezen | 2008/06/30 11:43 | 트랙백(1) | 덧글(10)

야후 블로그 랭킹

요샌 이런식으로 랭킹따지는게 참 많네요. 저도 한번 해봤습니다. 하는 방법을 몰라 좀 해맸는데 야후검색에서 아무거나 검색한다음 통합검색말고 블로그탭에 들어가 오른쪽 아래의 블로그 랭킹 검색에 http://~부터 입력하면 됩니다.

451위군요. 만단위 밖으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높네요. 표본도 상당히 많구요. 좋긴한데 대체 기준이 뭘까요?

by rezen | 2008/06/28 00:04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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