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9월 06일
닉네임 모에화라는 건데...
하는곳은 여기입니다. 저는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있던 폭력성이 드러나버렸네요.(웃음)
# by | 2009/09/06 03:39 | 트랙백 | 핑백(1) | 덧글(6)

# by | 2009/09/06 03:39 | 트랙백 | 핑백(1) | 덧글(6)






# by | 2009/08/11 03:20 | 트랙백(1) | 핑백(2) | 덧글(15)
밤중에 틈틈히 짬을 내서 전설의 고향 구버전(97~99년)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재미도 재미지만 그간 잊고있던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게 새삼 감회가 새롭더군요.




# by | 2009/08/10 23:58 | 기타 잡다한것 | 트랙백 | 덧글(18)

# by | 2009/08/10 22:44 | 기타 잡다한것 | 트랙백 | 덧글(12)
4. 면류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것은?
- 짜장면
5. 인스턴트 라면 중 가장 애호하는 것은?
- 농심 짜빠게티
6. 육식과 초식중 어디?
- 잡식
7. 우유 중 좋아하는 맛은?(흰우유 제외)
- 초코우유
8. 우유 중 좋아하는 브랜드는?
- 없음
9. 탄산음료 중 좋아하는것은?
- 사이다
10. 과일주스 '오렌지 포도 복숭아 사과 망고' 중 싫어하는것은?
- 없음
11. 핫커피와 아이스커피 중 어느 쪽?
- 아이스 커피~
12. 커피 중 제일 좋아하는 건?
- 단맛나는것
13. 양파 당근 오이 마늘 고추 피망 파프리카 브로콜리 양배추 토마토 상추 샐러리 칡 미나리 더덕 연근[...] 중에 못먹는것은?
- 오이랑 토마토
14. 배고플 때 집에서 제일 간단히 해먹는 요리는?
- 김치볶음밥
15. 리치, 망고, 망고스틴, 구아바, 두리안 중 먹어본 것은?
- 망고스틴, 달달하더군요.
16. 자신은 좋아하는데 남들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식성은? 3가지
- 없음
17. 제일 좋아하는 빵은?
- 소세지빵
18. 제일 좋아하는 도넛가게는?
- 도넛은 잘안먹음
19. 제일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가게는?
- 근데 아이스크림만 파는가게가 베스킨라빈스말고 있나?
20. 제일 좋아하는 피자가게는?
- 회원가입되어있는 도미노
21.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는?
- 초콜렛 케이크
22. 해외에서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었던 것.
- 닭구이랑 볶음밥(말레이시아)
23. 가장 이해가 안되는 다른나라의 식성.
- 별달리 아는게 없음
24. 술안주로 좋아하는건?
- 부대찌게, 치킨
25. 달콤한 것과 매운 것중 어느 쪽?
- 단것
26. 새콤한 것과 짭조름한 것중 어느 쪽?
- 짭조름한 쪽
27. '19'번 가게에서 꼭 먹는 맛?
- 태어나서 한 3번갔나
28. 프링글스는 어느 맛?
- 피자맛
29. 좋아하는 것을 계속 먹는타입? 신제품을 먹는 타입?
- 좋아하는 것 정확히 말하면 내 돈으로 살수 있는것
30. 된장 청국장 김치찌개중 무엇?
- 김치찌개
31. 외국인에게 꼭 먹이고 싶은 우리나라 음식은?
- 보신탕(그냥)
32. 계란 프라이는 어떻게?
- 왠만하면 완숙
33. 스테이크의 굽기는?
- 바싹 익힌게 좋지만 먹을일이 없음
34. 식혜 먹을 때 쌀과 음료의 비율은?
- 음료의 비중이 높아야 함
35. 제일 좋아하는 과자?
- 콘칩, 꼬깔콘
36. 패스트푸드 점은 어디?
- 한 3년 안가다 최근들어 어쩌다 한번씩 맥도날드로
37. 제일 좋아하는 초코렛 브랜드
- 아는게 없음
38. 짜장, 짬뽕 중 어느쪽?
- 짜장
39. 죽 중에 가장 좋은건?
- 전복죽(비싸서 못먹지)
40. 순대에서 못 먹는 부위는?
- 순대말고 다른 내장들
41. 제일 좋아하는 생선은?
- 간고등어
42. 편의점에서 가장 자주 사는 음식은?
- 요즘은 주먹밥
43. 삼각김밥은 어느 맛?
- 돈까스랑 참치
44. 제일 좋아하는 초밥은?
- 유부초밥(생선초밥은 겨자때문에...)
45. 차 종류 중 최고는?
- 꿀차
46. 가장 좋아하는 소고기 부위는?
- 갈비(하지만 못먹지)
47. 가장 좋아하는 돼지고기 부위는?
- 갈비
48. 가장 최근에 먹은 것은?
- 요구르트
49. 지금 먹고 싶은 것은?
- 치킨
50. 바톤 넘길사람
- 아무나 하고 싶으신 분
은근히 재미있네요.
# by | 2009/06/11 02:08 | 트랙백(12) | 덧글(5)

숙지는 이름이 도이고 여남군 사람이다. 예주에서 선주를 수행하여 명망과 관위는 항상 조운의 뒤였다. 그들은 함께 충성과 용맹으로 칭송되었다. 건흥 초, 영안도독, 정서장군에까지 관직이 올랐고, 정후로 봉해졌다. -계한보신찬-
진도(자 숙지)는 여남 출신으로 어떻게 유비를 섬기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며 아마 유비가 조조에게서 도겸을 구해주고 예주자사로 임명된 194년부터 조조의 공격을 받고 서주에서 완전히 축출되는 200년 사이에 임관한것으로 추정됩니다.
2. 주요 전공&직위
조운에 버금(다음)갔으며 종군은 많이 했다고 하는데 전해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제갈량은 한중으로 출병하려고 하면서 이엄이 반드시 뒷일을 맡아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강주로 옮겨 주둔시키고, 호군 진도를 남겨 영안에 주둔시켜 모두 이엄의 통솔하에 두었다. -이엄전-
제갈량이 본격적으로 북벌을 추진하던 226년에는 이엄 휘하에서 종군했습니다.
형장(제갈근)께서 백제성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가 비정예병일까 봐 근심하셨는데 사실 진도가 영솔하는 군사는 선제의 군사들 중에서도 백이로써 촉나라의 정예부대입니다. 만약 군사가 적은 것이 근심되신다면 강주의 군사를 이동시켜 병력을 강화할 것입니다.
-태평어람-
이 글은 제갈량이 북벌에 나서기 직전 형 제갈근에게 서쪽의 요충지인 백제성의 방비에 대해 걱정하는 서신을 받고 답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진도가 이끄는 병력이 선제(유비)때부터 내려오는 촉에서도 손꼽히는 정예부대라고 적고 있습니다.
사천성과일대에 거주하는 소수민족 중에 이족(彛族)이 있는데 이족 남자들이 흰 모전으로 지은 옷을 입었기 때문에 이 백이白彛의 병사들은 유비시절 편성한 이민족군단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자세한 창설 시기야 알수 없습니다만 유비 입촉이전 서천은 이민족과 토착 호족이 횡행하는 혼란한 땅이었고 제갈량 시절에 남부의 만인들로 정예부대 오부(五部)를 편성한 바 있기에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입니다.
계한보신찬 기록을 참고하면 진도는 이후(이엄이 실각한 후인지 언제인지 자세한 연도는 알길이 없지만)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승진해 계속 대오전선을 담당것으로 추정됩니다. 간략한 기록이나마 경험 많고 노련한 무장으로 일개 전선을 담당할 정도의 실력과 충성을 겸비했던것으로 보입니다.
3. 인품 및 특이사항
충성스럽고 강직하며 용맹스러웠다고 합니다.(짧아서 정리하긴 좋네요.)
이후에 중감군 및 정서장군으로 승진했다. 234년 제갈량이 죽자 강유는 성도로 돌아와 우감군 및 보한장군이 되어 군사들을 통솔하고, 승진하여 평야후로 봉해졌다. -강유전-
강유가 234년 제갈량 사망전에 정서장군 이었다니 진도는 그전에 죽은 모양입니다.
4 촉은...
한가닥 했을것 같은 사람은 많은데 하나같이 기록이 없습니다. 진도만해도 최대한 짧게 잡아도 30년 가까이 활동한 숙장인데 기록은 한쪽도 안되니...
# by | 2009/05/17 15:06 | 잡설 | 트랙백 | 덧글(14)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가장 크게 대놓고 반발했던 신하로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최만리 입니다. 일각에서는 한자 발음까지 중국식으로 바꾸려고 했던 세종의 과격한 계획을 음운상의 대혼란을 이유로 끝까지 뜯어 말린 기개있는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잘못된 낭설이며(해주 최씨 문중에서 많이 퍼나른다던데 그래서야 <원균행장록> 지은 원주 원씨랑 다를게 뭔지...)
그는 음운학에 대해선 전혀 몰랐고 반대 이유는 더 단순한 것이 었습니다.
세종 26년 2월 20일자에 실린 그의 유명한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에서 가장 잘알려진 구절은 오랑캐 운운하는 부분입니다만 이것은 그냥 미사여구 정도로 치부할수 있는 내용이고 요점은
세종 103권, 26년(1444 갑자 / 명 정통(正統) 9년) 2월 20일(경자) 1번째기사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뢰다
(중략)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 만약에 언문을 시행하오면 관리된 자가 오로지 언문만을 습득하고 학문하는 문자를 돌보지 않아서 관아의 구실아치들이 둘로 나뉘어질 것이옵니다. 진실로 관리 된 자가 언문을 배워 통달한다면, 후진(後進)이 모두 이러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27자의 언문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立身)할 수 있다고 할 것이오니, 무엇 때문에 고심 노사(苦心勞思)하여 성리(性理)의 학문을 궁리하려 하겠습니까.
이렇게 되오면 수십 년후에는 문자를 아는 자가 반드시 적어져서, 비록 언문으로써 능히 이사(吏事)를 집행한다 할지라도, 성현의 문자를 알지 못하고 배우지 않아서 담을 대하는 것처럼 사리의 옳고 그름에 어두울 것이오니, 언문에만 능숙한들 장차 무엇에 쓸 것이옵니까. 우리 나라에서 오래 쌓아 내려온 우문(학문을 숭상함)의 교화가 점차로 땅을 쓸어버린 듯이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전에는 이두가 비록 문자 밖의 것이 아닐지라도 유식한 사람은 오히려 야비하게 여겨 이문(吏文)으로써 바꾸려고 생각하였는데, 하물며 언문은 문자와 조금도 관련됨이 없고 오로지 시골의 상말을 쓴 것이겠습니까.
앞뒤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볼때 언문을 만들면 27자만 가지고도 입신할수 있는 쉬운 세상이 되고 그럼 성리학 숭상하는 사람이 없어지고 자칫 내 밥그릇(기득권) 날아갈수 있으니 절대 안돼라고 해석할수 있습니다.
정창손은 이보다 더 나아가
‘삼강행실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무지몽매한 아랫것들은 설명해줘봐야 모른다고 했다가 세종의 진노를 사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용속한 선비라고 욕 먹은 다음 훈민정음 반대한 신하중에서 유일하게 파직당합니다.
그리고 이보다 앞서
조선은 형법으로 명나라의 대명률을 가져왔고 여기에 역대 중국의 율문을 참조했는데 어려운 한자로 되어있는 베겨오다 보니 전문적으로 법을 다루는 관리들조차 이해하기 힘들어서 애를 먹었습니다.
현대 대한민국 법학도 처음에는 일본, 다음에는 독일법 베겨와 짜집기하다 국적 불명 용어가 판치고 후학들 돌아버리게 만들었는데 이때도 크게 다르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세종 58권, 14년(1432 임자 / 명 선덕(宣德) 7년) 11월 13일(무진) 2번째기사
안숭선이 《대명률》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중외에 반포할 것을 아뢰다
(중략)
대명률은 시왕의 제도인지라 의당 봉행하여야 하겠지만, 우리 나라 사람이 쉽사리 깨닫지 못하오니 마땅히 우리 말로 번역하여, 이를 중외(中外)에 반포하시와 국민들로 하여금 강습하게 하시어, 한 차례의 태(笞)나 한 차례의 장(杖)이라도 반드시 율에 따라 시행하여 인후하신 덕을 보여 주옵소서.” 하였다.
그래서 진작부터 이런 의견이 나왔고 훈민정음 창제 훨씬 전부터 백성의 교화를 위해 고민하고 백성들이 법을 몰라 죄를 범하는것을 늘 안타깝게 여겼던 세종은 1432년(세종 14)법전을 이를 방지하기 위해 법전을 알기 쉽게 번역해 백성들에게 반포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세종 58권, 14년(1432 임자 / 명 선덕(宣德) 7년) 11월 7일(임술) 1번째기사
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다. 임금이 율문을 이두문으로 번역하여 반포할 것을 이르다
“비록 사리를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율문에 의거하여 판단이 내린 뒤에야 죄의 경중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범죄한 바가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다 율문을 알게 할 수는 없을지나, 따로이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를 이두문으로 번역하여서 민간에게 반포하여 보여, 우부우부(愚夫愚婦)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함이 어떻겠는가.”
당시 이조판서 였던 허조는
“신은 폐단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간악한 백성이 진실로 율문을 알게 되오면, 죄의 크고 작은 것을 헤아려서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없이 법을 제 마음대로 농간하는 무리가 이로부터 일어날 것입니다.”
라며 반대했습니다. 당시 보수적인 신료의 인식은 대충 비슷했던것으로 짐작됩니다.
물론 세종은
“그렇다면, 백성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고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옳겠느냐. 백성에게 법을 알지 못하게 하고, 그 범법한 자를 벌주게 되면,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술책에 가깝지 않겠는가. 더욱이 조종께서 율문을 읽게 하는 법을 세우신 것은 사람마다 모두 알게 하고자 함이니, 경 등은 고전을 상고하고 의논하여 아뢰라.”
가볍게 논파해 버리고는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만 살펴봐도 세종이 사대부만의 성군이니 하는 그런 말은 못하죠. 원균옹호론처럼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나온것도 아니고 수령고소금지법(수탈은 죄고 무고랑 공무집행방해는 죄가 아닌 모양이지)과 저화, 도둑떼에서 몇년째 전혀 벗어나지 못한채 뱅뱅도는 세종폄하론에 낚이는 사람들도 참...
# by | 2009/05/17 03:18 | 잡설 | 트랙백 | 덧글(12)

이거보다 좀 더 낮은 수준입니다. 자기는 나이 안먹고 자기도 언젠가 후손들에게 옛날사람 대우를 받게 될거란걸 전혀 모르는 중2병 환자가 쓴 창조역사서(근거는 저자 머리속에만 있습니다.) 입니다. 쓰면서 조선왕조실록 한 줄이라도 읽었을까 싶더군요.
그러면서 다른 역사책은 다 엉터리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무지함과 오만함을 보고 있자니 제 낯이 다 뜨거워 졌습니다.
키작은 호빗 이순신이 제대로 치른 해전은 3번 뿐이고 그것도 압도적인 무기, 장비의 우세로 이룩한 보잘것 없는 것이러고 했던것이나 병자호란을 인구 50~60만의 후금에게 깨진 쪽팔린 전쟁이라고 했던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경술국치 무렵 조선이 아프리카 몇몇 나라를 제외하곤 가장 미개한 국가라고 했던 구절도 기억납니다. 장장 1000페이지에 걸쳐 이런 헛소리를 담을수 있다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죠.
기존의 상식, 통념이란 건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진실에 가까우며 재해석은 절대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는걸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근데 이런 쓰레기가 어느정도 먹혀들고 꽤 잘 팔리는걸 보면 한 100년쯤 지나서 대한민국은 너무 찌질하고 열등한 모순덩어리 국가라 늦어도 노무현때 쯤에 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이 나올겁니다.
# by | 2009/05/17 00:53 | 책 이야기 | 트랙백(1) | 덧글(25)
시중, 시랑인 곽유지, 비의, 동윤등은 모두 선량하고 성실하며 뜻과 헤아림이 충성스럽고 깨끗하니, 이때문에 선제께서 이들을 뽑아쓰고 폐하께 남긴 것입니다. 생각건데 궁중의 일은 크건작건 모두 이들에게 물으시고 그 연후에 시행하신다면 필시 부족한 점을 보충에 널리 보탬이 될 것입니다. -출사표 中-
국내에서 삼국지 전문가 소리 들었던 나모씨는 언제가 사무직, 책상물림은 인재가 아니라는 명언을 남겼지만(난세엔 치수공사 안하고 세금 안내고 밥 안먹고 사는 줄 아는 모양입니다.) 제갈량이 원정에 나선 동안 후방에서 정사를 돌보고 병참을 담당해준 이들이 없었다면 제갈량의 북벌은 이뤄질 수 없었습니다.
비의
자 문위, 형주 출신으로 촉으로 유학왔다 그대로 눌러앉아 유비 세력에 편입됩니다. 상사의 영향을 받아 워커 홀릭들로 가득찬 제갈량 부하들 중에선 드물게 만만디스런 인물로 가끔 지나칠 정도로 여유롭고 대범한 성격의 소유자 였습니다.
실무능력이 뛰어났던 수완가로 225년 남정때부터 대오 외교에 종사했습니다. 비의를 만난 손권은 해학스러운 말투에 끝도 없이 비웃음을 늘어 놓았고 제갈각등도 몇번이나 그를 말로서 꺾어 보려 했지만 시종일관 침착함을 잃지 않으며 대처해 손권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이적, 등지, 비의 등등 대오 외교에 종사한 인물들이 하나같이 다 걸물이라 한번씩은 말로 손권을 녹여 봤습니다..)
촉으로 돌아온 후 시중으로 승진했고 북벌시 성도에서 유선을 보필하며 사신으로서 제갈량과 유선 사이를 여러번 오갔습니다.
허구헛날 싸우던 촉한 공인 아웃사이더 양의, 위연의 중재를 맞아 사이나쁜 둘이 자신의 능력을 100% 발휘하는데 기여했고 제갈량이 죽었을때 반란을 일으킨 위연에게 사로잡힐뻔 했으나 기지를 발휘해 탈출합니다.
이후로 후군사를 거쳐 대장군, 녹상서사를 역임하며 차근차근 장완의 후계자 루트를 밟아갑니다. 244년 낙곡전투에서 왕평이 조상의 대만 군을 저지하는 동안 강유와 함께 본대를 이끌고 북상해 10만 위군을 철저하게 포위섬멸 시킵니다.
그러나 장완 사후 촉한의 국정을 이어받은 이후로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북벌을 중단하고 북벌을 추친하려던 강유에겐 1만의 병력밖에 주지않았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장완 사후 1인자로서 전권을 행사한 유선의 탓도 큽니다만 비의가 장완보다 소극적이고 리더쉽이 떨어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본인도 그에 대한 자각은 있었는지 오의 제갈각과 연합하고 한중에 주둔하며 복벌을 추진했으나 253년 1월 위에서 항복해 곽수에게 연회자리에서 암상당합니다. 호방한 성격 탓에 위에서 귀순해 온 자들을 지나칠정도로 가까이해 장억에게 한번 경고를 받기도 했으나 결국 그 점을 고치지 못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분히 결과론 적이긴 합니다만 황호와 붙어먹고 유선과 함께 촉한을 어지럽힌 진지를 높이 평가하고 중용하고 강유에게 제대로 된 정치적 기반을 남겨주지 못하는 등 촉한 멸망의 원인이 자라난 것도 비의 시절 부터입니다.
동윤
자 휴소, 비의와 짝을 맞춰 일했지만 성격은 비의와 정반대였습니다. 비의가 대범함이 지나칠 정도라면 동윤은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고 날카로운 성격이었습니다.
제갈양은 그의 대쪽같은 성품을 높이사 어린 유선을 곁에서 보좌하게 하고 출사표에 특별히 언급까지해 유선이 (허구헛날 잔소리 늘어놓는) 그를 쳐내지 못하게 했습니다.
제갈량이 북벌에 나섰을때 비의는 참군으로 승상과 황제 사이를 오갔고 동윤은 호분중랑장(근위대장쯤)이 되어 근위병을 총괄하고 실무파트를 담당했습니다.
정직, 청렴한 성품에 덕있는 선비를 우대하고 아랫 사람들에게 겸허했으며 나이가 들면서 자꾸 삼천포로 빠지는 유선에게 쉬지않고 직언을 했는데
대표적으로 후궁을 늘리려는 유선에게(유선은 여자를 꽤 가까이 했습니다. 유선 맏아들은 장황후-장비딸-의 시녀 소생이죠.) 천자의 후비수는 12명을 넘지 않으며 벌써 그 수를 다채웠으니 더 이상 늘릴 수 없다며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유선에게 알랑방귀 뀌며 접근하는 무리들도 가차없이 꾸짖어 그가 살아있을 때는 황관 황호도 함부로 설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246년 그가 사망하고 251년 진지가 상서령이 되면서 그때부터 조정이 본격적으로 어지러워 지기 시작합니다.
곽유지
그는 열전도 남기지 못했고 그나마 남아있는 기록이 적어 언제 어떻게 살다 죽었는지 알수는 없지만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그의 역활이 대충 어떤 것이었는지는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곽유지는 성정이 항상 온순하며 화해로워 관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평론을 처리하고 문서를 관리하는 일은 동윤이 전부 독자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동윤전-
비의와 동윤이 업무를 전담할 걸로 봐선 실무능력에서 비의, 동윤만은 못했던것 같습니다.
대신 선한 성품에 포용력이 있어서 너무 날카로운 동윤과 지나칠 정도로 호방한 비의 사이에서 중재와 조율을 담당한 모양입니다. 비의와 동윤의 단점은 보완하고 장점은 극대화 시킨다는 제갈량의 용인술이 돋보인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ps. 북벌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제갈량, 장완, 동윤은 후드려 까는 촉까들도 유독 비의에겐 호의적입니다. 북벌이 성공가능성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양반들이다 보니 아무래도 비의가 매력적으로 보이겠죠. 비의를 띄워주면 관련된 다른 인물들 까는데 쓰기도 편하다는 계산도 있었을 거구요.
# by | 2009/04/04 21:46 | 잡설 | 트랙백 | 덧글(8)
# by | 2009/04/01 02:46 | 잡설 | 트랙백 | 덧글(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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